[저자와 함께] '마라도의 역사와 민속' 고광민씨

[저자와 함께] '마라도의 역사와 민속' 고광민씨
"마라도 사람들에게 받은 가르침 담겨"
'신들의 유배지'인 거친 섬
  • 입력 : 2017. 11.30(목) 2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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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도 필드노트를 바탕으로 '마라도의 역사와 민속'을 낸 고광민 연구위원은 이름없이 살아가는 이 땅의 민중들에게 가르침을 받는다고 했다.

현장 누빈 필드노트 토대로
1883년 입경부터 신앙까지


그의 필드노트를 본 적이 있다. 그가 제주대박물관에 근무하던 때였다. 필드노트엔 현장에서 길어올린 말들이 손글씨로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 촘촘한 기록들로 그동안 '한국의 바구니', '어구', '제주도의 생산기술과 민속', '제주도 포구연구' 같은 책이 묶였고 지난해엔 '제주 생활사'를 낳았다. 특히 700쪽 가까운 분량으로 엮은 '제주 생활사'는 '제주도와 그 주변 사람들의 원초 경제사회 삶의 모습을 발굴'하려는 그의 오랜 노력이 녹아든 역작이었다.

공직을 떠난 지금도 우리네 삶의 현장을 누비고 있는 고광민 목포대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위원이다. 그가 이번엔 마라도 필드노트를 바탕으로 '마라도의 역사와 민속'을 냈다.

"절벽이 드높고 험하여 배도 붙일 포구가 없는 섬, 나무가 무성하고 빽빽하여 큰 뱀들이 우글거렸던 섬, 물이 귀하여 '마른 빨래'로 옷을 입었던 섬, 이런 섬의 땅과 갯밭을 일구어 삶을 꾸려온 마라도 선민들에게 이 자그마한 책을 드립니다."

책을 여는 글이다. 그의 전작들처럼 이 역시 그곳에 살고 있는 '여러분들로부터 가르침 받은 내용'으로 채워졌다. 마라도의 역사, 민속지리, 생산기술과 민속, 의식주, 사회와 신앙이 차례로 펼쳐진다.

토산리 이렛당 본풀이에 따르면 마라도는 제주도에서 버림받은 신들의 유배지였다. 본풀이 속 남편은 돼지고기 육식의 금기를 어긴 큰부인을 마라도로 귀양 보낸다.

신들의 유배섬이었던 마라도에 입경(入耕)이 이루어진 해는 1883년이다. 가파도 입경 시기인 1842년보다 41년이나 늦었다. 입경인들은 울창한 수림을 남김없이 베어내 불을 붙여 화전을 일구듯 마라도의 땅을 갈아엎었다. 동서로 돌담을 놓아 섬을 구획했고 북쪽에는 목장, 남쪽에는 인가와 밭을 배치했다.

비로소 사람사는 땅이 되었지만 마라도는 물이 귀했다. 암반에 고인 물에 솜을 적셔 짜며 그릇에 물을 모았다. 그 물을 항아리에 담아 식수로 썼다. 애초부터 빨래할 물은 염두에 없었다. 그래서 이 섬에선 아이들 옷소매에 붙은 코딱지 등을 양손으로 비벼내고 돌멩이 위에 내려치며 떨어내는 '마른 빨래'를 했다. 어른들 빨래도 다르지 않았다.

이같은 마라도의 역사와 민속은 변화의 바람 앞에서 '원초성'과 '소박함'을 잃은 지 오래다. 한해 2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마라도는 일부 해녀들의 물질을 제외하면 관광업으로 살아가는 섬이 됐다. 해녀들이 채취한 해산물도 관광 상품일 뿐이다. 저자는 이 말 끝에 "마라도는 크게 변하고 말았다"며 세찬 물결에 휩쓸려가는 섬의 모습을 안타까워했다. 한그루. 1만5000원. 진선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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