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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7년 성산포 씨름대회장이던 고성리 소금막 일원의 현재 모습. 토론회 자료집 [한라일보] 1927년 5월 16일 '성산포(당시 정의면) 씨름대회'는 그 지역 청년들에 의한 조직적인 항일투쟁으로 볼 수 있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9일 서귀포시 성산포수협 어업인복지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제주 성산면 씨름대회 항일운동 상징적 의미 재조명과 과제' 정책토론회에서다. 이번 토론회는 위성곤 국회의원과 제주도의회가 공동 주최·주관했다. 앞서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이 부결됨에 따라 재신청을 위한 전문적 연구와 정책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보고 토론회가 마련됐다. 성산포 씨름대회는 정의면 중앙청년회 주최로 고성마을 씨름장(속칭 소금막)에서 개최됐던 대운동회의 씨름 경기를 말한다. 풍랑을 피해 성산포로 대피했던 일본 어선 선원들이 씨름장 주변으로 몰려들었고, 경기에서 패한 일본인 어부 측과 정의면 청년들 사이에 집단 싸움이 벌어졌다. 체포된 청년들은 대부분 광주지방법원 재판에서 1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았으나 싸움을 유발한 일본인 선원들에 대해선 처벌이 내려지지 않았다. 이날 주제 발표를 맡은 박찬식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연사박물관 관장은 19세기 말 일제의 어장 침탈과 성산포, 일제 강점기 성산포 상황, 1930년대 해녀조합 횡포에 대한 투쟁, 재판 결과, 그 시기 신문 기사 등을 살폈다. 박 관장은 이를 토대로 "일본 검찰과 법원이 성산포 씨름 사건을 왜 '소요 및 치사 사건' 즉 단순 폭행 사건으로 규정했는지, 사건을 주도한 고은삼과 송세훈의 무죄 선고를 통한 항일 은폐 의도는 없는지 등을 들여다봐야 할 것"이라며 "우연한 싸움이 아니라 예전부터 있어 온 일본 어민들의 침략과 폭행에 대한 정당한 저항으로서 항일투쟁으로 볼 수 있다. 성산포 씨름 사건 검거자 명단을 보면 성산포 중앙청년회, 수산청년회, 오조청년회, 성산포청년회 등 각 청년회가 조직적으로 이 투쟁에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1940년 부산항일학생의거 사례도 들었다. 이는 그해 11월 제2회 경남 전력증강 국방경기대회에서 일본인 심판의 편파 판정에 항의해 동래고보 학생 등 1000여 명이 거리 시위를 벌이고 일본군 관사에 불을 지른 사건이다. 이 의거로 지금까지 13명이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았다. 박 관장은 성산포 씨름대회의 경우 지역 구술 자료 확보, 신문 기사 자료 집대성, 판결문 등 행형 자료 행간 파악, 종합자료집 발간 등 추가 자료의 발굴 조사 연구와 독립유공자 선정 실패 원인에 대한 명확한 진단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또한 성산읍 주민이 중심이 돼 제주도민과 함께하는 기념행사 개최 등을 과제로 제시했다. ■기사제보 ▷카카오톡 : '한라일보' 또는 '한라일보 뉴스'를 검색해 채널 추가 ▷전화 : 064-750-2200 ▷문자 : 010-3337-2531 ▷이메일 : hl@ihalla.com ▶한라일보 유튜브 구독 바로가기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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