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만 남은 유해… 당시 처참하게 학살 당해"

"머리만 남은 유해… 당시 처참하게 학살 당해"
가시리 '우구리동산' 4·3희생자 유해발굴 현장보고회
제보자 강군섭 옹 "유족 확인되며 가족묘지로 옮길 것"
  • 입력 : 2021. 03.31(수) 17:08
  • 백금탁·강다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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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일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 유해 발굴 현장보고회가 열렸다. 이상국기자

"오늘(31일) 유해 발굴 현장보고회가 있어서 어젯밤에도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유해 3구가 73년 만에 발견됐는데, 모두 두상(머리)만 남아 있어 개인적으로 당시 처참하게 학살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지. 11살이던 어린 소년은 벌써 흙이 되고 말았을 거야. 그래서 내가 듣기로 4구가 묻혔다는데 현재 3구만 확인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유해 발굴 장소에서 만난 제보자 강군섭(79·가시리) 할아버지는 "일가족 7명이 몰살당한 가시리 마을 출신 강원길(당시 48세)씨와 다른 가족인 김계화(당시 32·여)씨 및 그의 아들 강홍구(당시 11)군, 그리고 신원을 알 수 없는 1구가 포함돼 있을 것"이라며 "이들 희생자들은 1948년 12월 21일 가시리 남쪽 '우구리동산' 토굴과 움막에 피신 중이던 두 가족의 시신으로 토벌대에 의해 현장에서 학살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직도 4·3 당시의 참혹상을 생각하면 몸서리쳐진다"며 "이제라도 자신의 모시는 할아버지(강월길)에 대한 유해 발굴이 이뤄지고 유족으로 확인된다면, 남원읍 신흥리 가족묘지에 옮겨 제대로 모시고 싶다"고 말했다.

제보자 강군섭 할아버지가 유해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유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31일 제주도와 제주4·3평화재단은 4·3 당시 초토화작전으로 참상을 겪은 서귀포시 표선면 가시리에서 유해 발굴 현장보고회를 개최, 희생자로 추정되는 유해 3구에 대한 추도제를 올렸다.

보고회 자료에 따르면 초토화작전이 본격화되던 1948년 11월 15일 군경토벌대는 가시리마을에 들어와 닥치는 대로 총격을 가했다. 이날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30여명이 희생됐고, 토벌대의 방화에 의해 가옥 250여 채가 불에 탔다.

2018년 이후 3년 만에 다시 이뤄진 이번 유해 발굴은 그 의미가 크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고 암매장된 중산간 마을의 비극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4·3 73주년을 맞는 시점에서 제주사회에 또 다른 아픔과 함께 상생의 의미를 일깨우고 있다.

특히 유해 발굴은 최근 3~4년간 발품을 팔아 4·3평화재단과 연구소 등을 찾아다니면서 적극적으로 제보한 역할이 있어 가능했다. 발굴 현장인 과수원 주인이 무연분묘로 신청해 사라져 버릴 수도 있었지만 참혹했던 현장을 기억하고 증언하며 비로소 빛을 보게 됐다.

앞서 도와 4·3평화재단 및 유족회는 지난 3월 22일 유해발굴 개토제를 진행했고 이어 24~26일 일영문화유산연구원이 시굴 조사해 유해를 발견했다. 아울러 서울대 법의학연구실이 유해 발굴에 따른 시료 채취와 유전자 감식을 맡아 신원 확인을 벌이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은 이날 발굴된 유해를 조만간 제주4·3평화공원 봉안관에 안치하고, 향후 유족이 확인되고 유족이 요청할 경우 발굴 유해를 인계할 계획이다.

한편 도는 올해 국비 8억7000만원을 확보해 유해 발굴을 위한 기초조사와 유전자 감식, 그리고 유가족 채혈에 집중할 계획이다. 유전자 감식은 서울대학교 법의학연구실에서 맡아 진행한다. 특히 종전 친부모·자식 관계만 판별 가능했던 STR방식에서, 방계 6촌까지 판별 가능한 SNP 방식으로 검사를 진행한다.

도와 4·3평화재단은 2006년부터 현재까지 유해발굴과 유전자 감식을 통해 유해 405구를 발굴했다. 이 가운데 133구에 대한 신원을 확인했고, 나머지 272구에 대해서는 현재 신원을 확인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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