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표 박사와 함께하는 인문역사 강의] (8) 제주의 편액(상)

[홍기표 박사와 함께하는 인문역사 강의] (8) 제주의 편액(상)
문헌 확인된 조선시대 삼읍 편액 65개
  • 입력 : 2020. 10.20(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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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觀德亭) 현판 너머로 탐라형승(耽羅形勝),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 편액이 보인다.

관덕정 글씨 이산해 썼을까
‘남사록’ 이후 언급 없어
내부 탐라형승·호남제일정
제주 옛 이름 객사 영주관
미복원 38개 관심 가져야


편액(扁額)은 건물의 문과 처마 사이에 글씨를 새겨 붙인 나무판으로 흔히 현판으로 통칭한다. 조선시대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삼읍을 통틀어 많은 편액명이 전하는데 현재 문헌을 통해 소개할 수 있는 것은 총 65개소이다. 제주목은 제주목관아(이아 포함) 14개소, 제주성 문루 7개소, 제주성 부속 건물 10개소, 제주향교와 귤림서원 등 학교 건물 11개소, 기타 3개소의 편액이 있다. 정의현과 대정현은 현청과 향교 건물의 편액이 다수다.

65개소의 고건축 중 현재 복원되었거나 현존하는 건축물은 27개소에 불과하다. 미복원 38개소 역시 조선시대 역사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고건축들이다. 편액명의 성격을 분석하면 충신을 표명한 편액 12종, 위민 11종, 추모 8종, 병법과 군사 8종, 자연 7종, 제주 풍광 7종, 제주 옛 이름(영주) 인용 5종, 수양과 학습 5종, 제주 지명 활용 3종이다.

제주목 관내 관덕정(觀德亭)은 제주목 병사들의 무예 훈련장이었다. 관덕은 '덕을 바라본다'의 뜻으로 '예기(禮記)' '사의(射儀)'편의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에서 유래한다. 관덕정 편액은 창건 때 안평대군이 썼다는 사실이 신석조의 기문으로 확인된다. 그런데 1602년 김상헌의 '남사록'에는 그 편액이 중간에 불타버렸고, 그가 방문할 때는 이산해의 글씨가 걸려 있다고 했다. 현재는 이산해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나 '남사록' 이후 편찬된 1653년 이원진의 '탐라지', 1843년 이원조의 '탐라지초본', 1953년 담수계의 '증보탐라지'에는 안평대군이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 향후 연구가 지속되어야 할 것이며, 단정적으로 누구의 글씨라고 결론짓기는 어렵다. 내부엔 탐라형승(耽羅形勝)과 호남제일정(湖南第一亭) 두 개의 편액이 있다. 탐라형승은 제주목사 김영수의 글씨다. 호남제일정은 제주목사 박선양의 글씨로 관덕정이 제주만이 아니라 호남 지역을 통틀어 가장 웅장한 건물이라는 뜻으로 제액했다.

제주목관아 외대문엔 진해루(鎭海樓)와 탐라포정사(耽羅布政司) 편액이 걸렸다. 진해는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을 물리치기 위한 요새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포정사는 '관찰사(감사)가 집무하는 관청'의 뜻이다.

내부 우련당(友蓮堂)의 '우련'은 제주목사 이수동 제액으로 추정된다. 1737년 이후 동쪽 편 방에는 중앙에 올려 보낼 공물과 진상품의 보관소였던 향의실(享儀室)이 있었다. 홍화각(弘化閣)은 제주목사 집무처였다가 1713년 이후 아전들이 근무하는 영리청으로 변경됐다. 홍화는 '널리 교화를 이루다'의 뜻으로 글씨는 조선 세종 때 한성부판윤을 지낸 제주 출신 고득종(高得宗)이 썼다. 고득종은 "지방관은 이 누각에 올라 방탕하게 놀아선 안 되며 위임받은 직책을 끝까지 생각하여 임금의 덕화를 넓히고 민정에 통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연희각(延曦閣)은 제주목사의 동헌으로 편액은 지은이 미상이다. 망경루(望京樓)는 연회 장소이면서 북쪽 바다를 바라보며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망루다. 제주목사 김수문이 창건했기 때문에 그가 제액한 것으로 보인다.

제주의 옛 이름이자 한라산의 별칭에서 따온 영주관(瀛洲館)은 제주목 객사대청이다. 편액은 지은이 미상이다. 공제당(共濟堂)은 목사를 보좌하던 군관들이 근무하던 관청으로 이후 영주협당(瀛洲協堂)으로 명칭이 바뀐다. 귤림당(橘林堂)은 문화생활 공간이다. 김상헌과 이원진의 귤림당은 이아에 있던 건물로 소개했으나 이형상, 이원조, 담수계의 귤림당은 목관아 건물로 기록했다. 이아 쪽에도 귤림당으로 부르던 건물이 있다가 철폐되거나 다른 명칭으로 바뀌었으며, 그 후 목관아에 귤림당 건물의 창건 또는 다른 건물을 귤림당으로 개편했을 가능성이 있다. 애매헌(愛梅軒)은 제주목사의 쉼터로 귤림당과 같은 기능의 장소로 추정된다. 대일관(大一觀)은 임금이 지은 글과 글씨, 윤음(綸音)과 교서 일체를 봉안하는 곳이다. 청심당(淸心堂)은 당호로 보아 제주목사의 정신 수양처 또는 서재 등으로 추정된다.

이아에는 제주판관의 집무처인 찬주헌(贊籌軒), 제주판관의 동헌인 찰미헌(察眉軒)이 있었다. 찰미는 눈썹을 살펴서 백성의 마음을 잘 헤아려 다스린다는 의미다.

*강의 영상은 한라일보 유튜브 채널(촬영·편집 박세인 기자)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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