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26)올레(하)

[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26)올레(하)
올레는 산 자들의 집 구조를 본뜬 영혼의 통로
  • 입력 : 2020. 09.14(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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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담 한쪽에도 ‘신문’ 올레 있어
올레가 없으면 돌계단 만들어

정돌 놓아 사람 마소 출입금지




#생사일여 사생관(生死一如 死生觀)

자손들이 죽은 조상을 정성스럽게 제사 지내는 것은 효를 실천하고 길흉을 피하고 화복을 받기 위해서이다. 바로 명당을 찾아 그곳에 조상을 묻는 것도 나쁜 일은 막아주고 좋은 일은 더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인 것이다. 그래서 죽은 조상이 우리와는 살지 않지만 오름 자락에 혼백으로 남아 자손들을 보호해주면서 함께 있다고 생각하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관념 때문에 제사를 모신다. '영혼의 집'이라고 부르는 산담이 자손들에 의해 관리되고, 그곳에 조상이 살고 있다고 생각하며 제사를 지내는 것도 무사안녕을 위한 가족주의인 것이다.

산담 안에서 올레를 지키듯이 서 있는 동자석.

산담은 15세기에 부모의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효도를 실천하는 마음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600년이 흐른 지금, 산업의 변화로 가치관이 달라지면서 산담은 그 효력이 다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세상의 변화를 막을 길이 없지만, 적어도 지난 시대에 구축된 거대한 대지예술이 한 순간에 가치가 없는 것처럼 전락해버리는 것을 볼 때, "인간에게 문명의 가치란 무엇인가?"라고 반문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산담에 있는 '영혼의 집' 신문(神門)

산담은 살림집의 관념이 사자(死者)에게 적용된 것으로 금기가 있다. 그래서 아무 때나 산소에 갈 수 없으며 사자와 거리두기를 한다. 요즘 산담이 있는 무덤에 가는 날은 일 년에 몇 번이 있다. 청명이나 한식, 음력 팔월 초하루 전후에 벌초 때, 문중(門中)이 정한 묘제일, 집안에 장례가 났을 때, 결혼, 합격, 승진의 경사(慶事)나 군대, 발령, 장기 출장 등 타향으로 출타 시나 고향으로 돌아온 때 등 가는 날을 손가락으로 셀 수 있으며, 이 외에는 무덤에 가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다.

올레의 시작과 끝을 구분한 산담.

원래 올레는 산 자들의 집의 구조다. 올레는 제주의 골목을 일컫는 말로, '마을길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기다랗고 구부러진 길'을 말하는데 정확히 집 마당 바로 직전까지이다.

산담에도 올레를 만드는 데 영혼이 드나들기 위해 산담 한 쪽에 만든다. 올레는 영혼이 다니기 때문에 신문(神門)이라고도 하는데 지역에 따라 올레. 오래, 올레-도, 도, 시문(神門)이라고도 한다.

산담의 중요한 구조인 올레는 영혼의 세계 또한 삶의 세계를 그대로 옮겨놓은 유교적인 생사관(生死觀)에 기인한다. 산담의 올레[神門]를 산 사람들이 출입하는 골목과 같다고하여 올레라 부르고 있는 것은 영혼 또한 거처하는 장소가 다를 뿐 산 사람 같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문'이란 신문(神門)의 와음(訛音)으로 신이 다니는 길이라는 뜻이다. 신문이라는 말은 종묘나 향교에 신들이 다니는 문(門)인 신문(神門)을 모방하여 한학자들이 부르는 것이 산담에 정착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또한 왕릉의 신이 다니는 길인 신도(神道)의 모방적 표현이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제주에서 무덤을 '산'이라고 부르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한(漢)나라 이후 황제릉을 '산릉'이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하여 무덤을 '산'이라고 부른 것이고, 유독 제주에서만 무덤을 '산'이라고 부르고 있다.

도는 출입구를 이르는 제주어이다. '이아주소(爾雅註疎)'에 의하면, 도는 길(途)이라는 뜻으로 곧 도(道)이다. 도(道)는 '곧다(直)'라는 의미인데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는 것이다'라고 했다. 로(路), 장(場), 유(猷), 행(行)은 도(道)로써 '길'의 이름을 널리 말한 것이다. 산담에서는 '도'를 '길'이라는 속뜻을 포함하는 출입구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올레의 위치는 산담의 좌측과 우측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드물게 산담 전(前)측에도 보인다. 단묘(單墓)의 산담 전측의 올레는 좌측이나 우측에 있으며, 쌍묘(雙墓)의 올레는 산담 전측 중앙, 혹은 남자 중심으로 전측의 왼쪽에 만든다.

산담의 올레는 좌측이나 우측, 전측에 약 40~50㎝ 가량 통로를 내고 그 위에 길쭉하게 다듬은 돌을 1~3개까지 올려놓는데 이를 '정돌'이라고 한다. 마치 산 자의 집 올레 입구에 정주석에 정낭을 걸친 것과 같다. 산담의 올레 출입구 안팎으로 사각형의 돌이나 평평한 자연석으로 마치 문지방처럼 땅에 묻어 올레 경계의 시작을 표시하고, 그 올렛길에는 잔돌을 깔아 영혼이 편하게 다닐 수 있도록 만든다. 간혹 올레 안쪽 산담 안에 댓돌을 놓아 영혼이 신발을 벗을 수 있도록 한 경우도 있다. 또 올레가 없는 산담인 경우 산담 앞쪽 중앙에 안팎으로 계단을 놓아 영혼의 출입이 쉽도록 배려한다. 또 남녀 무덤의 산담에 올레를 만들지 못할 경우 올레의 위치에 돌계단을 놓아 영혼의 길임을 표시한다.



#"여 오른쪽, 남 왼쪽에 50㎝가량 담 터"

향토사학자 고(故) 박용후 선생은 신문(올레)은 일반적으로 '여자의 묘는 오른 쪽에, 남자의 묘는 왼쪽에 50㎝가량 담을 튼다'고 하였다. 필자가 수백 개의 산담을 살펴보니 확률적으로 과연 그 말이 사실이었다. 풍수가 정성필 선생도, 생존 시 이승에서는 '남좌여우(男左女右)는 원래 음양의 이론으로서 남자는 양(陽)에, 여자는 음(陰)에 해당하여 좌측은 양이 되고 우측은 음이 된다'고 하는데, 동양 음양사상의 일반적인 관념이다.

3개의 정돌을 올려 놓은 올레.

이 관념에서는 저승세계에서는 이승세계의 질서였던 남좌우여(男左右女=左上右下)가 반대로 남우여좌(男右女左=右上左下)가 된다. 그러니까 현실세계에서는 좌측이 위고 우측이 아래인데 저승세계에 가서도 좌보다 우가 위지만 여전히 남존여비의 차별적 대우는 변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산담의 쌍묘를 살펴보면 망자를 기준으로 해서 남자는 우(서쪽), 여자는 좌(동쪽)에 묻힌다. 그러나 산담의 올레의 위치를 보면, 살아있을 때 좌(남자)가 위이고, 우(여자)가 아래라는 관념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으며 이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의례 집행자도 남자이기 때문에 남자는 죽어서도 위를 차지한다.

또 합묘도 마찬가지로 이 원칙이 적용되는데, 곧 망자가 누운 머리 위치를 기준으로 해서, 남자는 오른쪽(서쪽)에, 여자는 왼쪽(동쪽)에 시신을 누이는 것은 망자를 높이는 우상좌하(右上左下)의 원칙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산담의 올레를 내는 경우에는 이승의 방식으로 올레를 내고 있다. 남자의 산담에는 망자의 시점에서 좌측에 올레를 내고 있고, 여자는 우측에 올레를 내고 있다. 간혹 이런 원칙을 벗어난 올레도 있는데 산담 앞으로 올레를 내는 경우, 좌우가 모두 트인 경우, 남녀 좌우의 올레가 바뀐 경우도 있으나 이는 특수한 경우이다.

사실상 울타리는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두 있는데 산담에서 보면, 올레의 기능은 영혼〔魂魄〕만 다니는 전용 출입구이며, 영혼의 기일(忌日)이나, 명절 때에만 이 올레를 통해 제사에 다녀온다. 그리고 산담에서 산자가 다니는 출입구는 바로 산담 네 귀퉁이의 귓돌인데 산담의 지지대이기도 하다. 이 귓돌은 마지막으로 그 집안의 사위가 들어다 놓았다고 한다.



#정돌의 역할

정돌은 산담의 올레 위에 얹어놓는 돌인데 길지만 모나게 다듬은 돌이다. 지름 20~30㎝, 길이 50~70㎝ 가량 둥글넓적하게 생긴 돌이다.

두 개의 정돌.

산담의 올레는 영혼의 출입구이기 때문에 1~3개의 길쭉한 정돌을 올려놓아 산 자나 마소의 출입을 금한다. 정돌의 갯수는 산담의 넓이에 따라 다르지만 산담의 일반적인 크기로 보아 2개의 정돌이 가장 흔한데 산담의 크고 폭이 넓으면 3개의 정돌을 놓는다. 외담 산담에는 올레가 없으며, 1960년대 말 이후 유행했던 시멘트 산담인 경우에도 올레를 만들지 않았다.

<김유정 미술평론가(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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