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23)시민화가 문정호

[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23)시민화가 문정호
제주신화 서천꽃밭의 부활 아름답고 찬란한 색채화
  • 입력 : 2020. 08.24(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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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에 부활시킨 신채색화
서양 미학 허위의식 깨우쳐
제주의 상상력 고향, 한라산

#민(民):인민, 민간, 민중, 시민

민간화가, 민중창작의 소질이 있으나 프로화가가 아닌 일반인 화가를 말한다. 1980년대에는 민중(民衆)이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1970년대 말 우리나라에서 불렀던 특별한 용어이다. 민(民, people, civilian)은 고대에 백성이라는 말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의 인민이나 민중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본래 백 가지 성(姓)을 가진 귀족을 가리켰으며, 중국 고대 국가에서는 귀족연합체를 말하기도 했다. 민은 현대에 와 깨어있는 사람, 억압받는 사람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 민중(民衆)이라는 말로 재탄생했다. 1980년대 미술이 민중이라는 개념과 만나면서 소위 군부독재 체제에 대항하는 '민중미술'이라는 이름으로 명명되기도 했다.

목각 채색 작품 앞에 앉은 시민화가 문정호. 2020년 8월 11일 KBS전시실.

우리나라 삼국시대에도 개개인을 인민(人民)이라고 부르는 기록이 보이지만 해방 후 북한 정권이 수립되면서 북한의 국가 이름에 인민공화국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면서 '동무'와 함께 남한에서는 사어(死語)가 돼 버렸다. 민(民)은 평민(平民), 서민(庶民)이라고 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보통사람, 일반인, 민간인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아마추어 화가를 어떻게 불러야 할까. 원래는 '민중미술가, 민중화가'라 불러야 하겠지만, 이 명칭은 이미 1980년대 군부 독재정권에 저항했던 미술인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면서 한국적 상황이 만든 특별한 정치적인 용어가 돼 버렸다. 그래서 취미, 혹은 화가를 지망하는 아마추어(amateur:素人, 비전문가) 화가를 부를 때, 서양에서는 '일요화가'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필자는 민간인 화가의 현대적 명칭인 시민화가라고 부르겠다.

#황혼에 붓을 든 열정의 화가

시민화가는 현대인으로 도시에 살면서 취미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를 말한다.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을 농민화가라고 하는 것과 같다. 우리 시대 시민화가 한 사람이 있다. 문정호, 1936년 생, 우리 나이로 85세의 고령이며, 제주시 삼양 1동 출신이다.

문정호는 아버지 문용원과 어머니 안치선 사이에 4남 2녀 중 막내였고, 둘째 형이 4·3 사건 때 무고하게 희생되자 정신적인 충격이 매우 컸다고 한다. 32세 나이에 결혼하여 낚시 배도 타고 농사를 짓다가 1973년 경 제주도립병원에 취직해 2008년 제주대학병원에서 정년퇴임을 했다. 손재주가 좋았던 문정호는 30대~50대까지 취미로 생활에 필요한 가구나 물건을 만들기 위해 오래된 나무를 수집했고, 굴무기(느티나무)로 궤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솜씨가 좋다는 소문이 나면서 사람들이 집으로 목가구를 보러 오기도 했다. 제주의료원에 근무할 때부터 여러 가지 나무에서 동물이나 새를 연상시키는 형상들을 발견하고는 무엇인가 만들어 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고 한다. 그 후 문정호는 더욱 나무 수집에 매진했고, 나무의 형상을 보고 새부리, 말 머리, 돼지, 두루미, 부엉이, 고양이 등을 찾아 작업을 했으며, 점점 자연의 나무만이 아니라 생활 속 부러진 상다리 등을 작품 소재로도 이용했다. 2008년 정년 퇴임한 후에 만든 목조각들은 서양화를 전공한 막내딸의 조언으로, 아크릴 물감으로 그 목조각에 부분적으로 색칠을 해 제1회 목조각 개인전을 열었고, 그 때 함께 선보인 회화가 주위로부터 재미있다는 호평을 들었다. 이후 나무판에 상상 속의 동물, 새, 꽃과 자연을 그리면서 2012년부터 본격적인 시민화가의 길로 들어섰고, 그 성과로 2018년 제2회 개인전을 열 수 있었다. 당시 작품의 소재는 처음 목조각을 만들었던 상상 속의 동물, 새, 곤충이었으나 점차 TV나 신문에서 본 장면, 오름에 고사리를 따러 가서 보이는 꽃이나 나무, 그리고 젊은 시절 등반했던 한라산, 오름, 천지연, 천제연, 정방폭포, 쇠소깍 등의 장소들의 기억을 더듬어 독학의 필력으로 자신만의 상상적 세계를 펼쳤다.

문정호, 우리 초상님, 60×90cm, 나무판에 아크릴릭, 2020.

#제주도 채색화의 깜짝 부활

문정호의 색채는 찬란할 정도로 화려하다. 아이들은 자신이 아는 것 중 보기 좋은 것만을 그린다. 그래서 천진함이 그대로 배어나면서도 원시적인 생명력이 느껴지기도 한다. 아이들과 원시 사회 사람들은 단순하고, 규칙적이고, 대칭적인, 그리고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있는 반복성을 선호한다. 자연에서 느낀 것들을 순수한 추상적인 형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상 같지만 추상과 같은 구성, 순박한 배열, 반복의 조화미가 눈에 띄게 된다.

우리의 전통적인 회화사에는 크게 네 가지 흐름이 있는데 양반 사대부들이 그렸던 문인화(文人畵), 일종의 그림 그리는 공무원이었던 도화서(圖화署)의 화원화(화員畵), 금어(金魚:畵僧)가 그린 도교·불교의 진채(眞彩:불투명 채색) 인물화, 그리고 민간에서 그려졌던 민화(民畵)가 그것인데, 문인화는 수묵 위주의 시·서·화 3절(節)을, 화원화는 채색과 수묵을 곁들인 궁중 실용화와 감상화를, 민화는 생활 속의 건강한 채색화들을 그렸다. 소위 문정호의 채색화는 조선 후기부터 유행했던 민화와 맥과 닿아 있고, 그 민화는 다시 화원화·도석화(道釋:도교화와 불교화)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민화에는 채색화의 전통이 생생하게 살아있고 자유분방한 민중의 건강한 생명력이 있게 된 것이다.

특히 채색화는 고구려 고분벽화, 신선화(神仙畵), 불화(佛화), 화원화, 민화가 전해오고 있으나 그 중 단연 고려불화가 으뜸이지만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채색화의 맥이 사실상 끊겼다. 또한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서양화가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우리의 전통회화는 문전박대까지 당한다.

문정호, 상상의 꽃나무, 60×50cm, 나무판에 아크릴릭, 2020.

제주의 채색화 전통 또한 단절되었다. '관덕정 대들보 벽화', '내왓당 무신도(巫神圖)'와 '효제문자도(孝悌文字圖)', '탐라순력도', '영주십경도'의 양식과 채색을 계승하지 못했고, 오늘날 아카데미 교육 과정에서도 찾아볼 수 없어 제주도 전통회화에 채색화가 있었는지 조차 잊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시민화가 문정호의 등장은 제주도 채색화의 오래된 기억을 다시 더듬게 해주었다. 비록 80대 고령이라는 안타까움이 있으나 21세기에 민간화라는 이름으로 제주도 채색화의 부활을 시민화가의 손으로 다시 보게 된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늦었지만 문정호에 의해 하나의 제주도 채색화의 표본이 존재하게 돼 '이루후제' 미래의 화가들이 채색화를 연구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아름다운 색채로 서천꽃밭을 보여줘

서천꽃밭, 온갖 꽃들이 피지만 어떤 꽃인지는 모르는 환생꽃이 피는 유토피아. 서천꽃밭을 그린 문정호의 채색화를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다. 여전히 서양 미학의 이데올로기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색채 면에서 우리가 칭송해 마지않는 인상주의의 아름다운 색채와 대비해, 또는 일본의 우키요에(浮世繪), 구스타프 클림트의 탐미적 색채, 폴 고갱의 원시주의, 반 고흐의 욕망 충동의 심리적 색채들에 버금갈 정도로 문정호의 오방색 배색은 신기하리만치 아름답다. 아카데미에서 배운 적 없이도 이처럼 찬란한 색채가 가능한 역설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문정호의 출현은 정확한 형태 위주의 그림을 예술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오방색의 화려한 색채를 미신으로 취급하는 우리의 미학적 허위의식이 깨쳐지는 기회가 됐음이 분명하다. 예술은 놀이하는 인간에서 무엇인가 특별하게 만드는 미학적 인간으로의 진화이다. 문정호가 80평생까지 꿈꾸었던 아름다움의 근원에는 우리네 자연의 색이 어우러진 서천꽃밭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아니 그곳이 진정 새소리, 곤충의 날개짓, 물소리, 바람 소리, 밤사이 꽃 피우는 소리가 들리는 바로 제주인의 상상력의 고향, 한라산이 아니었을까.

<김유정 미술평론가(전문가)>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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