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람 이방익 표류현장을 가다Ⅱ] (5)호구사

[제주사람 이방익 표류현장을 가다Ⅱ] (5)호구사
"만리 밖 사람 천우신조로 빼어난 경치 보고 가네"
  • 입력 : 2019. 08.27(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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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주 이어 강남 제일도시 소주에
"청홍색 옷들이 보기에 찬란하다"
30간 법당 호구사 흔적 희미해도
반공 솟은 호구산 칠층탑 그대로

중국 항주를 떠난 이방익 일행이 북경으로 가는 길에 다다른 곳은 소주(蘇州, 쑤저우)다. 항주와 소주는 일찍이 강남을 대표하는 두 도시로 꼽혔다. 그 중에서 소주는 강남의 도시 가운데 최고로 통했다. 이방익이 거쳐갔던 청나라 시절엔 5대 도시 중의 하나로 중국 경제의 중심지였다.

국가5A급풍경구인 호구산을 찾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기기묘묘한 바위 등을 보며 추억을 남기고 있다. 사진=진선희기자

"큰 배와 작은 배에 이층의 누각을 올렸는데 아리따운 여인들이 유리창과 청사 발을 반만 열고 지나는 배를 엿본다. 상류로 올라가니 물가 좌우에 여러 층의 누각이 녹음 속에서 은은히 비치고 구경하는 남녀가 강구에 가득 모여 있어 그들의 청홍색 옷들이 보기에 찬란했다. 채선 30척이 녹음 속으로 지나가니 풍경도 기이하다."

이방익이 기록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표해록'에 묘사된 소주 풍경의 일부다. 항주 못지 않은 번화한 기운이 전해온다.

호구산 칠층탑. 호구사 사찰의 흔적은 찾아보기 어려웠지만 반공에 솟아 있는 칠층탑은 그대로였다

소주부에 도착한 이방익은 왕공의 안내로 배를 타고 가다 호구사(虎丘寺)의 칠층탑을 본다. 이방익의 '표해록'과 '서이방익사'는 호구사로 가는 여정이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앞은 호구사를 먼저 본 뒤 한산사를 구경한다고 되어있고 뒤의 기록은 한산사 다음에 호구사를 찾는다고 나왔다.

"왕공과 더불어 배에서 내려 절문으로 들어가니 수십 명의 중들이 비단신을 신고 목휘를 두르고 목에 28염주를 걸고 고깔을 쓰고 있었다. 우리를 영접하여 들이기에 따라가며 살펴보니 4문이 웅장하고 현판에 호구사란 글자를 황금으로 써놓았다."

그가 들른 호구사는 법당 4면이 30간에 이르는 규모였다. 법당의 금부처는 탑 위에 앉혔다. 부처의 앉은 키가 두 길이였고 몸 둘레는 여남은 아름이나 되었다.

호구산 칠층탑이 보이는 너럭바위 옆에 '검지(劍池)'란 글자가 새겨져있다.

현재는 호구사란 이름의 사찰이 존재하진 않지만 220여년 전 이방익이 목격했던 칠층탑은 국가5A급풍경구인 호구산에 그대로였다. 이방익은 '홀연 높고 높은 칠층탑이 반공에 솟아있고 황금으로 만들었는지 누른 빛이 기이하다'고 적었다. 그의 말대로 칠층탑은 하늘을 찌를 듯 했다. 959년에 착공해 961년에 완공한 것으로 전해진다. 높이 약 48m에 달하는 팔각형 탑으로 약 15도 기울어져 있어 '중국판 피사의 사탑'이란 별칭이 있다. 이방익은 당시 칠층탑 위에 올랐던 듯 '사방을 둘러보니 천지가 광활하고 산천이 다 기이하다'고 했다. 그 높이를 짐작할 수 있겠다.

호구산 칠층탑이 있던 정상에서 내려오는 길, 넓적한 바위가 놓여있다. 그 옆에 '검지(劍池)'란 글자가 새겨졌다. 연암이 '서이방익사'에서 호구산을 설명하면서 소개한 그 '검지'인 걸까. 연암은 그 대목에서 "양쪽으로 깎아지른 수천 척 높이의 절벽이 마치 칼로 자른 듯 하며 거기에는 맑고 차가운 물이 콸콸 소리내며 흐른다"고 했다.

소주 최대의 정원으로 꼽히는 졸정원.

중국 속담에 "하늘에는 천당이 있고, 땅에는 소주와 항주가 있다(上有天堂 下有蘇杭)"고 했다. 소주의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곳 중 하나는 '소주원림(蘇州園林)'이다. 원림을 정원을 뜻하는 말로 소주원림은 예로부터 강남 제일로 불렸다.

탐방단은 '졸정원(拙政園)'에서 잠시 그 명성을 누렸다. 졸정원은 명나라 때 만들어진 소주 최대의 정원으로 중국 4대 명원에 든다. '어리석은 자가 정치를 한다'는 의미를 지닌 '졸자지위정(拙者之爲政)'란 시의 한 대목에서 따온 이름이라고 했다. 연못 주변에 피어난 갖가지 꽃과 나무가 정자 등과 어울려 한 폭의 그림을 그려냈다.

선각(線刻)호구도 속 장면으로 저 멀리 칠층탑이 보인다.

이방익도 소주에 체류하는 동안 그같은 즐거움을 느꼈으리라. "우리 만리 밖 사람으로 천우신조하며 이 땅에 이르러 천하승경을 다 보고 가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호구사를 빠져나온 이방익이 배에 올라 왕공에게 건넨 말이다. 이방익을 태운 배는 어느덧 호구사를 지나 한산사로 미끄러져 간다.

자문위원=권무일(소설가)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

글=진선희기자

"성안의 수만 인가가 연결, 강남 물색 아침부터 번화"

강남에 발디뎠던 최부는 일찍이 항주와 소주를 '인간이 사는 세상의 천당'으로 여겼다. 특히 소주를 찾은 최부는 사람과 물화가 사치스럽고 누대가 서로 연이어 있는 도시의 풍경을 기록해놓았다. 소주는 항주와 북경을 잇는 대운하의 중심지로 각종 물산이 모여들었으니 그럴 만 했다.

이방익 역시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표류민의 신분이었지만 소주의 찬란함에 홀딱 반했다. 소주를 기억해놓은 '표해록'의 대목대목이 그 점을 말해준다.

"성안으로 들어가니 수만 인가가 연결되어 있고 길가의 저자들은 채단과 보화를 쌓아놓았다. 단청한 관사들은 아침이라 조용한데 강남 물색이 아침부터 저렇듯 번화하다."

'서이방익사'에 표류에서 살아돌아온 이방익의 구술을 담아냈던 연암 박지원도 소주의 화려함을 덧붙여 적었다. "중국 사람들이 말하기를 강산이 아름답기는 항주가 제일이요, 번화하기는 소주가 제일이라 하였고 또 여자의 머리는 소주 여인의 모양새를 제일 알아준다고 하였다. 무릇 소주는 한 주의 부세만 보더라도 다른 고을에 비하여 항상 10배가 더하니 천하의 재물과 부세가 소주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주를 두고 '동양의 베니스'라고 부르는 이들이 있다. 도시가 수로로 연결되어 있고 작은 배를 타고 이웃을 오가는 광경 때문이다.

'평설 이방익 표류기'의 저자인 권무일 작가는 "이방익은 꿈에서도 보기 어려운 화려하고 생동하는 도시에 이르러 황홀감을 감추지 못했을 것"이라며 "거리의 아름다움, 사람의 활기찬 모습, 여인들의 옷과 장식에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는 걸 그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고 했다.

진선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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