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 말고 살아 있거라"… 조은호 옹의 꿈

"죽지 말고 살아 있거라"… 조은호 옹의 꿈
남북정상회담 계기로 이산가족 만날 수 있을까
70년 가까이 친인척 18명 인적사항 모두 외워둬
"제발 정상회담 잘 진행돼 고향에 꼭 가봤으면…"
  • 입력 : 2018. 04.26(목) 17:55
  • 송은범기자 seb1119@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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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파일 : 1조은호22.jpg(1)

조은호 할아버지는 생이별한지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친인척 이름 모두를 기억한다. 강희만기자

"조부는 조기직 1887년생이고 아버지는 조근장 1910년생, 숙부는 조근학 1925년생…."

 26일 제주시 도남동 자택에서 만난 조은호(85) 할아버지는 6·25전쟁으로 인해 생이별 했던 가족들의 인적사항과 한문 이름까지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부모님과 형제는 물론 백부와 사촌형제 등 무려 18명을 말이다.

 "전쟁이 나기 전 17살 때까지 평안남도 대동군 용산면 초담리에서 20여명의 친인척이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살을 비비고 같이 지냈는데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특히 아버지와 소달구지를 타고 농산물을 팔기 위해 평양시내에 갔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1950년 12월 조은호 할아버지의 가족들은 뿔뿔히 흩어져야만 했다. 전쟁에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피난이 진행될 때 하필 조 할아버지만 가족과 떨어져 외가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개성과 파주, 서울 등을 거쳐 같은해 12월 28일 부산까지 이르게 됐다.

 "부산에서 막노동을 하고 일이 끝난 후에는 영도다리 인근에 있는 게시판에 혹시 월남했을지 모를 가족들을 찾기 위한 벽보를 붙였어요. 그러나 가족들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고, 결국 1952년 해병대 제17기생으로 입대를 결심했습니다. 국군이 북진을 하게되면 고향에 갈 수 있으니까요."

 

조은호 할아버지가 전쟁 당시 가족과 헤어져야 하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강희만기자

하지만 전쟁은 한반도를 반으로 갈라놨고, 조 할아버지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고향도 볼 수 없게 됐다. 이후 조 할아버지는 1979년 12월 31일 주임상사로 제대할 때까지 군생활을 이어갔다. 이 과정에서 월남전에 참전해 고엽제 피해를 입어 상이용사가 되기도 했다.

 "군생활이 끝난 이후 1980년부터 아내의 고향인 제주에 정착했습니다. 내 혈육은 모두 북쪽에 있어서 갈 수가 없으니까요."

 제주에서 조 할아버지는 지난 2000년부터 이산가족으로 등록해 북에 있는 가족을 만날 날을 기다리고 있지만 여태껏 반가운 소식은 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27일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서로간 왕래가 가능할 수도 있다는 예측에 한 가닥 희망을 걸어보고 있다.

 "국가유공자에 상이군경으로까지 등록돼 돈 걱정은 없습니다. 제발 이번 회담이 잘 진행돼 죽기 전에 꼭 한번 고향에 가고 싶습니다."

 조은호 할아버지는 이제 부모님은 돌아가셨다고 믿고 매년 음력 9월 9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음력 9월 9일은 세상을 언제 떠났는지 알 수 없는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날이라고 해 대부분의 실향민들은 이날 제사를 지낸다. 조 할아버지에 남은 희망은 아직 살아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동생 조명호(82), 여동생 조은옥(78)씨다.

 "명호야 은옥아 아직까지 너희 형이 이렇게 살아있다. 너희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오빠는 대한민국에서 멋있는 해병대에 입대해 월남전까지 참전했단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 죽지 않고 살아만 있거라. 언젠가 꼭 만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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