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n라이프
[이 책] 속삼킨 숲의 소리… 수십만 펜 선으로 품어내다
김영화의 '북받친밭 이야기'
박소정 기자 cosorong@ihalla.com
입력 : 2025. 11.07. 02:00:00
[한라일보] "간혹 산꾼들이 그 숲을 지나다가 뒹구는 솥단지에 발길이 채였을 뿐 숲이 속삼키고 있던 '북받친밭의 이야기'를 들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슬픔에 귀 기울이는 이들이 있다면 울음소리는 닿기 마련이다. 언젠가부터 제주의 고통을 기억하려는 이들이 그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본문 중)

제주 그림책 작가 김영화는 들려오는 그 숲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제주 사려니숲길 근처 '북받친밭'은 제주에 불어닥친 4·3의 광풍으로 1948년 12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제주읍 중산간 마을 사람들이 토벌을 피해 숨어 지낸 곳이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움막을 짓고 추위와 배고픔을 견뎌야 했다. 무장대 사령관이던 이덕구의 최후가 깃든 곳으로도 전해진다.

"지난 겨울부터 올여름까지 그려 온 숲을 천천히 둘러본다. 숲이 말을 걸어온다. 죽는 것이 더 슬펐을까? 잊히는 것이 더 슬펐을까? 익숙한 질문이었지만 새로운 대답을 하고 싶었다."(본문 중)

작가는 70여 년 전 '북받친밭 그 숲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이야기'를 따라 세월이 흘러 울창한 숲이 돼버린 아무도 찾지 않은 그곳을 찾아갔고, 제주의 아픈 역사를 품은 그 숲을 그리기로 했다.

그는 2023년 겨울부터 지난해 초여름까지 7개월간 수십 차례 현장 답사를 하고 작업실로 돌아와 벽 3면에 온장 한지를 이어 붙이고 그 숲을 옮겨 그리기 시작했다. 하루 16시간씩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며 세필 붓 하나로 선을 그었다. 130개 붓펜을 닳아 없앤 끝에 높이 2.7m, 길이 17m의 그림을 완성했다.

이렇게 그려낸 그림과 북받친밭의 이야기를 담아낸 그림책이 바로 '북받친밭 이야기'다. 길이가 4.2m에 달하는 27폭짜리 병풍 형태로 된 책은 앞면과 뒷면에 모두 '북받친밭 이야기'가 담겨있다. 책 앞면은 오늘날 숲의 겨울부터 초여름까지의 시간을 담았고, 뒷면에는 4·3 당시 겨울부터 초여름까지 그곳에서 피란생활을 하던 사람들과 항쟁 끝에 스러져간 사람들의 이야기가 시간순으로 펼쳐진다.

책 속에는 '발자국'이 이어진다. 북받친밭에서 스러진 사람들의 발자국과 그곳을 찾은 작가의 발자국이 그려졌다. 이는 과거의 그들과 오늘의 우리를 단절시키지 않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담겼다.

현기영 작가는 추천사에서 "김영화는 그 숲의 기억을 전수받기를 갈망했다. 그리하여 간절한 세필로 그 숲을 묘사한 그의 그림들은 4·3의 기억을 새롭게 일깨워 주는 역사화가 됐다"고 말했다.

제주 토박이이면서 제주의 자연과 역사를 그림책에 담아내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작가는 '무등이왓에 부는 바람'과 '봄이 들면' 등의 그림책을 펴냈으며 이 가운데 '무등이왓에 부는 바람'으로 한국출판문화상과 대한민국그림책상을 받았다. 이야기꽃. 3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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