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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觀] 홍이
이토록 사나운 사랑
고성현 기자 kss0817@ihalla.com
입력 : 2025. 10.13. 02:00:00

영화 '홍이'

[한라일보] 거의 대부분의 아기들이 처음으로 배우는 말이 '엄마'라고 한다. 아마도 아이를 낳은 엄마가 '내가 네 엄마야, 나를 엄마라고 불러봐'라는 간절한 사랑의 주문을 내내 속삭였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는 자라면서 그 최초의 단어를 여러모로 사용한다. 모든 요청의 접두어로 쓰고 분노와 슬픔을 가누지 못할 때는 다른 말 대신 그 단어만을 수차례 연이어 발음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성인이 되면 그 단어는 발음할 때와 글자로 쓸 때 이상한 지연의 시간을 갖게 만든다. 의미가 생긴 것이다. 내내 세차게 발음했던 그 두 음절의 단어에 엄마와 아이의 세월의 겹친 채로 무게를 갖는다. 엄마가 아이를 낳았을 즈음의 나이가 되면 엄마는 더 이상 단어로서만 존재할 수 없는 무엇이 된다. 물에 젖은 솜처럼 무겁고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아득한 양감으로 그렇게.

황슬기 감독의 장편 데뷔작 <홍이>는 홍이와 서희, 두 모녀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일견 가족 영화의 외피를 두른 것 처럼 보이지만 이 장르를 떠올릴 때 쉽게 예상하는 따뜻함, 애틋함 같은 서정성과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다. '남에게만 착한 딸, 나에게만 못된 엄마'라는 작품의 홍보 문구처럼 영화 속 딸 홍이(장선)와 엄마(변중희)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로 보인다. 둘 사이에는 살가운 말이나 다정한 눈빛이 오가는 법이 없고 각자가 품 속에 품었던 바늘로 불시에 서로를 찌르는 사이, 너무 가깝지만 멀어지기를 작정한 관계 그것이 홍이와 서희의 지금이다. 영화는 요양원에 있는 서희를 홍이가 자신의 집으로 데려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엄마가 필요했던 것보다는 돈이 필요해서 홍이는 지긋지긋했던 엄마와의 한 집 살이를 다시 시작한다. 그러나 엄마의 통장이 홍이의 지금의 삶을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비정규직 여성인 30대의 홍이는 불안한 매일을 사는 처지다. 잊히지 않는 꿈은 너무 멀리 있고 가난과 불행은 두 손에 쥔 채로 다가오는 하루하루를 맞닥뜨린다. 잦은 거짓말로도 화를 덮지 못한 채로, 마치 이름처럼 내내 벌겋게 달아 오른 마음으로. 이렇게 불덩이만큼 뜨거운 홍이에게 서희는 물이 아닌 기름 같은 존재다. 식지 않는 불과 줄어들지 않는 기름의 동거. 관계의 뿌리마저 다 태워 버릴 것 같은 일촉즉발의 위기들이 이어진다.

홍이와 서희는 함께 살 수 있을까, 이 모녀가 서로를 호명하는 순간에 사랑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황슬기 감독은 모녀의 이야기를 최선을 다해 불편하게 만드는 것을 통해 관객의 마음을 천천히 흔드는 쪽을 택한 것 같다. 홍이와 서희는 관객이 쉽사리 감정을 이입하기 어려운 캐릭터들이다. 그저 애처롭거나 안쓰럽다고 대상화하기엔 두 사람 모두 각자의 현실에 발을 디딘 입체적인 캐릭터들이다. '사람은 착하니까, 마음은 그렇지 않을 테니까'로 두둔하기에는 여기저기 용수철처럼 솟아 올라 관객의 허용 범위를 수시로 뚫어 버리는 이들이다. 때론 못되고 자주 이기적이며 종종 철부지처럼 군다. 세상에 쉬운 건 하나도 없는 홍이에게 가장 가까운 엄마 또한 너무 어려운 숙제이고 세상을 다 이길 것처럼 구는 서희에게 홍이는 마땅치 않는 딸인 동시에 결국엔 질 수 밖에 없는 유일한 편이라는 것. 불행과 다행 사이를 오가던 모녀가 결국 마주하는 것은 화려하지도 뜨겁지도 않은 황혼이다. 불발이 만들어 낸 이상한 평화 속에서 그 잠깐의 침묵 속에서 둘은 마치 처음으로 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제서야 등 돌린 두 사람을 마주한 관객들 또한 알게 된다. 보이지 않는 아주 사나운 사랑이 둘 사이에 자리 하고 있는 것을.

<홍이>는 청년에서 중년으로 향하는 홍이와 장년에서 노년으로 접어드는 서희를 통해 지금 이 땅의 여성들의 표정과 그늘을 집요하게 상기시키는 여성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두 얼굴을 배우 장선과 변중희가 맡아 연기한다. 긴 시간 동안 수많은 독립영화 속 다채로운 캐릭터들을 만나온 두 배우는 노련하고 성실한 태도로 어려울 수 밖에 없는 캐릭터인 홍이와 서희를 뜨겁게 끌어 안는다. 영원히 새로울 수 밖에 없는 모녀의 이야기가 두 배우의 포옹을 통해 지금의 지금에 도착해 있다. 이 또한 쉽지 않은 사랑의 결과임을 안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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