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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농업유산 제주의 화전(火田)] (3)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⑫아라동 죽성, 민밧
"농막 짓고 지슬(감자) 구워먹으며 고사리밭서 화전 농사"
이윤형 백금탁 기자 yhlee@ihalla.com
입력 : 2023. 11.30. 00:00:00
[한라일보] 제주시 아라동 삼의악 근처. 분지처럼 생긴 너른 평원지대가 있다. 제주시민들에게는 고사리밭으로 알려진 곳이다. 해마다 봄철에는 고사리 꺾는 사람들이 즐겨찾는 이곳은 예전에는 화전 지대였다. 1950년대 초반까지 화입에 의한 화전농사가 이뤄졌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주변은 삼의악 오름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림지대를 이루지만 이곳만 유독 잡목이 거의 없는 평원지대다. 취재팀이 최근 찾은 이곳은 주위는 온통 갈색으로 변해 시들어가는 죽은 고사리만 무성하다. 해발 500m 일대로 현재 아라동공동목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삼의악 인근 널찍한 평원지대서
1950년대까지 화전 일구며 살아
지금은 봄철 고사리밭으로 알려져

죽성 마을 이정표 돌담으로 방치
소중한 공동체 유산들 점차 멸실
사라지기 전 지역사회 관심가져야


삼의악 오름이 솟아있고 그 앞 너른 평원지대는 1950년대까지 화전 농사가 이뤄졌다. 지금은 고사리밭으로 알려져 있다.

이 일대는 조선시대 제주에 조성한 국영목장 가운데 3소장 지역이다. '제주군읍지 제주지도'(1899)를 보면 3소장에는 상잣성 위로 화전동이 나타난다. 최근 본보 특별취재팀 조사에서 처음 확인한 상잣성(11월 15일자 5면, 11월 16일자 7면) 위쪽 지역이다. 3소장 상잣성은 봉개동과 아라동 지역까지 한라산을 두르듯이 이어진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화전과 목축을 겸했다. 여전히 화전에 대한 추억을 간직한 사람들도 있다.

취재팀 자문위원인 진관훈 박사는 "지난 해 만난 아라동 염광아파트 근처 단독주택에 거주하는 김모 할머니(84세)는 해방 이후 6·25 전쟁 때까지만 해도 이곳 목장 밭을 불을 놓으며 개간한 뒤 농사지었다고 했다"고 말했다. 아라동 마을 가까이에 마땅히 농사지을 땅이 없거나 부족하면 걸어 한두 시간 거리 삼의악 뒤편 목장 밭에 가서 화전 농사짓다가 수확이 끝나면 다시 본 마을로 내려왔다. 화전이 더 이상 행해지기 전 주요 재배작물은 조가 가장 많았고 이외에 피와 팥, 배추 등도 경작했다. 주인이 있는 목장 밭이라 해도 사정을 말하고 주인에게 수확물의 일부를 성의껏 내면 대부분 허락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대나무가 무성한 오등동 죽성 마을 옛길 따라 취재팀이 답사하고 있다.

농사철에는 그곳에서 농막을 짓고 살았다. 농막은 아궁이가 별도로 없었고, 땅바닥을 움푹 파서 주변의 돌로 만든 오막살이였다. 아궁이가 없는 '정지(부엌)'에서 '감저(고구마)'나 '지슬(감자)'을 구워 먹고 그 옆에 '새(띠)'가 깔린 방에서 비스듬히 모로 누워 잤다. 김 할머니는 지금은 감귤 농사를 짓고 있어서, 화전을 하지 않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사에 쓸 고사리도 장만할 겸 해서 가끔 그곳에 가서 예전 살았던 농막 흔적을 찾아봤다고 했다.

화전과 관련한 지명도 나타난다. 아라1동 산 59번지와 산 62번지 사이를 흐르는 하천은 '새산전내(川)'라 했다. 삼의양 오름에서 남쪽으로 1㎞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내로 예전 이곳이 화전 지대이던 당시'새로 만든 화전'에서 흐른다는 데서 연유했다고 한다.

아라동에 속하는 법정동인 오등동 지역도 화전이 이뤄졌다. 화전민들에게는 과중한 세금이 부과됐다. 오등동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제주면 오등리 였다가 1955년 시로 승격되어 제주시가 분리되면서 오등동이라 하였다. 이후 1962년에 아라동에 속하게 되었다. 오등리는 죽성, 민밧 등 5개의 자연마을로 이뤄졌다.

죽성 마을 안길에 마을 이정표가 새겨진 암석(붉은 사각형 점선)이 담장으로 이용되면서 방치되고 있다.

대나무가 많다는 데서 명칭이 유래한 죽성은 '큰가름', '새가름', '새장밭', '큰담밭', '선돌목' 등 5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죽성은 오등리 중심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애조로변 덕흥사 입구에 잃어버린 마을 표지석이 있다. 그 주변으로 해서 옛 마을 안길과 집터에는 대나무가 무성하다.

'민밧'은 죽성에서 남동쪽으로 500m 정도 올라가면 해발 300m 지점에 있던 마을로 10여세대가 있었다. 1914년 세부측량 당시 이곳이 오등동의 시초 기점이 됨으로써 오등동 1번지로 시작된 마을이다. 민밧 마을은 화전마을이라고도 했다. 죽성에 살던 고씨가 축산을 목적으로 옮겨간 것이 설촌의 시초로 약 100여 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일대는 경사면을 따라 계단식으로 경작지가 형성돼 있다. 아직은 개발에서 비켜난 곳이어서 비교적 원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마을 이정표 암석을 확대한 사진으로 붉은 점선안에 '竹'자 등이 새겨져 있다. 특별취재팀

오라동 화전은 문헌에서도 나타난다. 1899년 봉세관 강봉헌이 화전세 징세 자료로 작성한 '제주삼읍공토조사성책, 州山場新起火田株(주산장신기화전주)'에는 "三所吾等境三十八人火粟田七斗八升落睹錢七十八兩"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3소장 오등 지경에서 화전민 38인에게 화속전 7두(斗) 8승(升) 락(落, 마지기)에 78냥 화전세(火粟田)를 징수하였다는 내용이다. 당시 화전에는 대부분 조(粟)를 파종했다. 때문에 조(粟)를 경작한 화전이란 의미로 '火粟田(화속전)'이라 했다.

3소장은 1900년 무렵에는 사실상 폐장된 상태였다. 폐장을 전후해서 오등동을 포함한 지금의 아라동 지역에서 광범위하게 화전 농사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곳은 지리적 위치로 인해 예전부터 제주시 목안(제주성 일대)에 물자 공급기지 역할을 했다.

화전과 이를 토대로 생활을 영위했던 흔적들은 오늘날 사라지고 있다. 덕흥사 입구 죽성 마을로 들어서면 길옆 담벼락에는 '竹'(대나무 죽)이라 새겨진 직경 대략 1m 크기의 조그만 암석이 있다. '竹'자 옆에는 이보다 작게 '오등리 죽성동'이라고 한자로 새겨져 있다. 마을 이정표로 쓰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무관심속에 방치되고 있다. 그동안 화전에 대한 제주사회의 무관심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마을 이정표뿐만 아니라 몰방애 등 화전과 관련한 생활문화유산, 마을공동체를 보여주는 유산들은 이처럼 홀대받고 있다. 이러한 소중한 유산들을 체계적으로 수집 정리하는데 지역사회가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특별취재팀=이윤형 편집국장·백금탁 행정사회부장 / 자문=진관훈 박사·오승목 영상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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