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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농업유산 제주의 화전(火田)] (3)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 ⑨동광리 무동이왓에서 만난 사람
마을 잊혀지고 주민들 떠나도 대형 몰방애는 남아
이윤형 백금탁 기자 hl@ihalla.com
입력 : 2023. 10.26. 00:00:00
취재팀, 화전 마을 주민들 이용
대형 몰방애 확인… 애환 상징
대형으로 문화재급 손색없어
마을 등장 형성 소멸 이주 반복
“이주사·개발사 재조명해야”


[한라일보] 화전을 일구며 대대로 살아온 집은 불타 없어지고, 마을은 잊혀져도 여전히 옛 삶의 터전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저마다 가슴 한 구석에 아픈 가족사와 마을공동체가 해체되는 안타까운 사연들을 품고 있다. 취재팀은 이 과정에서 옛 화전 마을 무동이왓에 있던 대형 몰방애의 존재를 확인했다.

방형으로 조성된 동광리 양잠단지. 특별취재팀

취재팀은 지난 7월부터 안덕면 동광리 일대에서 수차례 취재에 나섰다. 동광리는 무동이왓, 조수궤, 사장밧, 간장리, 삼밧구석(마전동) 등 5개의 자연마을에 약 200여 호가 살던 마을이다. 자연 마을 가운데 무동이왓이 130여 호 정도로 규모가 가장 컸다. 대부분 제주4·3으로 잃어버린 마을이 됐다. 그 후 인기척이 끊긴지 수십 년 세월이다.

취재팀이 만난 강기수(1947년 생) 어르신은 무동이왓 자신의 옛 집터 자리에서 현재 농사를 짓고 있다. 부친이 4·3때 돌아가시고, 지금도 유골을 찾지 못해 한으로 남아있다고 한다. 당시 42명이 한꺼번에 트럭에 실려 간 후로 여지껏 행방을 모른다. 이날도 마을에 살지는 않지만 마음이 심란해서 밭에 나와 소일하는 중이라고 했다.

무동이왓에서 만난 강기수 어르신.

강 어르신이 난리통에 폐허가 되다시피 한 무동이왓으로 돌아온 것은 8세 때다. 당시 무동이왓에는 7가구, 강 씨 집안만 살았다. 이후 1969년 재건부락(양잠단지)이 생기면서 그곳으로 옮겨갔지만 마음의 상처가 깊어 마을 일대를 자주 서성인다.

"우리는 (화전을)방화(방애)한다고 해수다. 불을 떼고 남은 불치(재)를 손으로 좁아 메밀을 재배했주 마씸. 이곳에서는 주로 메밀을 했고, 아버지는 수확이 끝나면 산에 올라 가수다." 난리통에 부모님은 자왈에서 살다시피 했다고 했다.

강 어르신은 그러면서 "마을에 있던 몰방애가 현재 동광리 본동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나무 구루마를 인근 마을에서 빌려다가 몰방애 옮기는데 이용했다. 무동이왓에는 몰방애가 여럿 있었지만 4·3당시 마을이 없어지면서 하나둘 소실됐다고 했다.

취재팀은 동광리 본동 버스정류장 근처 소공원에서 몰방애를 찾아냈다. 주민들의 쉼터 역할을 하는 곳에 한눈에 봐도 커다란 몰방애가 놓여 있다. 자연석을 정을 쪼아가며 손으로 일일이 다듬어 소박한 느낌마저 준다. 이 몰방애는 크기가 압도적이다. 몰방애 아랫돌이 직경 243㎝ 정도에 이른다. 이는 제주의 대표 박물관인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 전시중인 몰방애 이상이다. 취재팀이 비교 결과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에 야외 전시중인 몰방애중 가장 큰 것 아랫돌 직경은 240㎝ 정도다. 제주도에서 확인되는 몰방애중 가장 큰 규모에 속하는 것 중 하나로 문화재급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무동이왓 화전민들의 눈물과 한숨, 아픈 역사가 배어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동광리 본동에서 대형 몰방애를 조사하는 취재팀.

동광리 본동에서 만난 홍춘호 할머니.

취재팀은 이곳에서 4·3유족이자 해설사로 활동하는 홍춘호(1938년 생) 할머니를 만나 당시 겪었던 비극과 생활상을 들을 수 있었다. 홍 할머니도 무동이왓 출신이다. 11세 때 4·3을 겪었다. 부친은 4·3당시 4대 독자였는데 8월에, 어머니는 23세 때 돌아가서 폭도새끼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았다. 짐승도 그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덤덤히 말했다.

홍 할머니에 따르면 당시 무동이왓에는 집이 있는 몰방애 4기, 없는 거 1기 등 모두 5기가 있었다. 주민들은 어느 한곳만 이용하지 않고 붐비거나 하면 근처 아무 곳이나 이용할 수 있었다고 했다.

"이곳에 옮겨진 몰방애는 정미소가 들어서기 전까지도 이용해수다. 소나 말 2마리가 돌리는데, 아이들이 소를 몰고 어른들이 곡식을 올려서 정제했주 마씸." 21세 때 이 동네로 시집을 왔으니까 1960년대까지 이용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제주에서도 이렇게 큰 몰방애는 없을 거우다"고 자랑했다.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 야외에 전시중인 몰방애.

대나무가 무성한 무동이왓 마을 안길.

무동이왓에서는 지금도 그렇지만 메밀, 감자, 산디 등을 많이 재배했다. 당시 개간해서 메밀을 재배했는데, 화전밭은 자기네 밭이고 목장 밭은 아무라도 가서 불을 놓을 수 있었다고 했다. 목장 밭은 보통 화전 밭을 말한다. 소똥, 말똥 등을 모아뒀다 태우고, 남은 거랑 불치(재), 오줌, 메밀 씨앗 등을 버무려 손으로 뜯어내면서 밭에 뿌려서 키웠다고 했다. 홍 할머니는 마치 어제 지나간 일처럼 당시 생활상을 술술 풀어놓았다.

화전을 일구며 살았던 무동이왓은 지금은 집터만 남아있다. 집과 마을을 연결하던 올래와 안길에는 대나무가 유독 많다. 이곳에는 예부터 대나무가 많아 탕건, 망건, 양태, 차롱 등을 많이 생산했다고 한다. 제주의 대표적인 수공예품 주산지임을 실감케 한다.

무동이왓 사람들은 4·3 이후 지금의 동광리 본동인 간장리에 성을 쌓고 정착했다. 무동이왓과 삼밧구석, 조수궤 마을이 사라졌다. 이후 주민들은 다시 한번 이주를 하게 된다. 1969년 동광리 74번지를 중심으로 양잠단지가 조성되고, 일부 주민들은 이곳에 모여 살았다.

양잠단지는 사각형 가로망을 따라 들어섰다. 지금으로서는 구획정리된 공간이다. 화전 마을의 터전이었던 중산간 일대가 정부 정책에 따라 본격 개발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된다. 얼마 남지 않았던 무동이왓 사람들도 완전히 마을을 떠나고, 오랜 세월 부침을 겪었던 공동체는 사라진다.

제주의 화전 마을 대부분은 마을의 등장과 형성, 소멸, 이주, 다시 새로운 마을 공동체의 조성을 겪는다. 제주 화전민의 삶과 화전의 역사가 곧 제주의 역사, 아픈 근현대사이자 개발사이기도 한 이유다. 무동이왓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단적인 예다. 대형 몰방애의 존재처럼 소중한 생활유산들이 사라지기 전에 화전의 역사와 생활상, 생활문화유산들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져야 한다. 특별취재팀=이윤형 편집국장·백금탁 행정사회부장, 자문=진관훈 박사·오승목 영상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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