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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농업유산 제주의 화전(火田)] (3)떠난 사람들, 남겨진 흔적들-② 동홍동 연저골
80년 전 잊혀진 화전마을터 생생… 실태조사 시급
이윤형 백금탁 기자 hl@ihalla.com
입력 : 2023. 08.10. 00:00:00
1942년까지 존속하다 폐촌
길게 이어진 올레·집터 등
당시 화전 마을 모습 간직
옛길, 소통로이자 역사의 길
조사·활용방안 마련 나서야

[한라일보] 1940년대 폐촌돼 지금은 잊혀진 화전 마을 터가 80여년 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6월 22일과 7월 28일 취재팀은 두 차례에 걸쳐 서귀포시 미악산 서북쪽 일대(동홍동 산 27번지 일대) 탐사에 나서 '연저골'로 불린 화전 마을 터를 확인했다.

이곳에서는 길게 이어진 올레와 집터, 집담, 밭담 등이 당시 마을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올레는 길이 40m, 폭 1.8~2m, 담장 높이는 1m 안팎으로 집터까지 곧장 연결돼 있다. 올렛담은 자연석을 쌓은 형태로 일부 허물어졌으나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올레 뒤쪽으로는 집터와 대나무가 무성히 자라고 있다.

주변으로는 집터로 추정되는 5~6곳이 확인된다. 눈길을 끄는 것은 길이 약 80m 정도 되는 올레를 따라 집터가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집터 주변으로는 화전을 했던 농경지가 있고 산담을 정성스레 조성한 커다란 분묘 3기가 자리하고 있다. 집담은 미끈한 하천석과 자연석을 촘촘히 쌓아올렸다.

옛 화전 마을인 연저골에는 올레와 집터, 옛길 등이 잘 남아 있다. 취재팀이 마을을 이어주던 옛길을 조사하는 모습. 특별취재팀

이곳 일대는 인공적으로 조림한 삼나무를 비롯 잡목이 자라고 있지만 화전 경작 당시에는 너른 개활지로 농사에 안성맞춤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마을 앞쪽으로는 소하천이 흐르고 있어서 생활용수를 구하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는 여건을 갖추고 있다.

소하천과 집터 사이로는 폭 3~4m의 옛길이 길게 나 있다. 옛길은 법정사 방향으로, 반대편은 5·16도로변 한라산둘레길 인근으로 이어진다. 이 길을 따라 화전 마을간 왕래와 교류가 이어졌다. 강제검 난(1862년), 방성칠 난(1891년) 등 구한말 잇따른 제주민란 당시에도 이 길을 통해 다급한 소식이 전해지고, 화전 마을 사람들은 거사에 동참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옛길은 화전 마을과 마을, 주민들을 잇던 소통의 길이자 역사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연저골은 이곳 지형이 제비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燕卵)이라는데서 왔다고 한다. '연제골','연자골'이라고도 불렀다. 연저골은 1942년쯤 마지막 남아있던 주민이 떠난 후 잊혀진 마을이 됐다. 연저골의 마지막 주민은 강 할머니다.

연저골에 남아있는 집터

진관훈 박사는 2005년에, 1928년 출생 이후 1942년까지 14년간 부모님과 함께 연저골에서 화전 농사지으며 살다가 서귀포시 동홍동으로 내려온 강 할머니(당시 80세)에게서 화전 마을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강 할머니 가족이 연저골에 살기 시작한 때는 강 할머니의 증조할아버지 자식 중 막내 할아버지가 제주시 애월읍 장전에서 이주하면서부터다. 연저골이 한창일 때는 18가구 정도 살았다. 강 할머니 가족처럼 대부분 화전과 숙전(熟田)을 병경작(倂耕作)하는 겸(兼) 화전민이었다. 집들은 대부분 삼 칸 초가집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큰방(안쪽에 고팡), 마루, 작은방(작은방 안쪽에 부엌)으로 이루어졌다. 마당은 200~300평 정도로 넓은 편이었다. 산전이나 '멀왓'에서 수확한 곡물들을 마당에서 건조하고 탈곡해야 했기 때문이다. 현재 연저골 집터에서도 너른 마당이 딸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생활용수를 얻었던 소하천을 취재팀이 살펴보고 있다

연저골에는 '산물'(동홍동 산 20번지)이 있었다고 한다. 수량이 풍부해서 식수나 생활용수에 부족함이 없었다. 생수가 나는 둘레를 '산물어위'라 불렀다. 산물 근처에 본향당이 있었는데 마을 부녀자들은 그곳에 일 년에 세 번 정도 다녔다. 산물과 본향당은 소하천과 그 주변에 자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저골에서 재배한 작물은 주로 보리, 조(주로 맛시리), 피, 메밀, 감자 등이었다. 이외에 감저(고구마), 토란, 양애(양하), 산마 등이 생산되어 생활에 큰 불편이 없었다. 무, 배추, 참깨 등은 오히려 아랫마을보다 수확이 많았다고 한다. 강 할머니 밭에서는 보통 일 년에 메밀 서른 섬을 수확했다. 그래서인지 마을 인심이 후한 편이었다.

옛 모습 거의 그대로 남아있는 올레

1930년대까지 연저골에는 '말고래'가 한 곳 있었다. 강 할머니 집에는'도고'(掉臼, 절구) 방아가 한 대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제사 때 빌려가곤 했다.

연저골 사람들은 농사 외에도 '테우리'일을 겸했다. 아랫마을에서 소나 말을 올리면 미악산(솔오름) 근처에서 이 마소를 돌보는 일을 했다. 농번기가 끝난 뒤에는 숯을 구웠다. 숯 굽기는 여러 사람이 한 번에 숯(백탄)을 구웠다.

화전 마을에선 해안 마을과는 달리 여건상 제사상에 올리는 생선을 장만하기 어렵다. 그때는 대신 나무를 생선 모양으로 다듬어 만든 목어(木魚)를 이용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강 할머니의 아버지는 제사 한 달 전쯤 미리 해안 마을가서 솔라니(옥돔) 한 마리 사다가 '새'(띠)로 만든 도구에 소금 간 많이 한 뒤 종이에 싸서 안방 위에 매달아 두었다가 제사 때 썼다. 저녁에는'솔칵(관솔, 송진이 많이 엉긴 소나무 가지나 옹이), 호롱불, '각지불'을 켜고 살았다.

화전 마을에서도 교육열은 높았다. 강 할머니 남동생은 6살 때부터 아버지가 모는 말을 타고 서귀포시 1호 광장에 있는 서당에 글을 배우러 다녔다. 강 할머니는 서당에 가는 대신 물로 연필 적셔가며 동생 어깨너머로 천자문을 습득했다.

진 박사는 "제주4·3 때문에 잃어버린 마을이 된 다른 화전 마을과 달리 연저골은 1942년 강 할머니 가족이 동홍동으로 내려오면서 사실상 폐촌되었다. 일제 강점기 제주도민 ¼ 정도가 일본으로 돈 벌러 갔는데, 이로 인해 생겨난 도내 노동력 공백을 화전민들이 메꾸었다. 더는 힘든 화전 농사를 짓지 않아도 제주도 농촌에 경제활동 기회가 많았기 때문에 화전민들이 해안 마을로 내려가게 된 것"이라고 했다.

제주의 화전 마을은 4·3사건 당시 사람들이 떠나면서 잃어버린 마을이 된 경우가 많다. 이와 달리 연저골 주민들이 마을을 떠난 데는 이런 역사적, 사회적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연저골은 화전 마을의 흔적을 잘 보여주는 소중한 유산이다. 올레와 집터 등이 더 이상 멸실되기 전에 실태조사 등이 이뤄져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제주의 화전 마을과 주민들의 생활상을 조명하고, 활용방안을 고민해 나가야 한다.

특별취재팀=이윤형 편집국장·백금탁 제2사회부장

자문=진관훈 박사·오승목 영상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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