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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觀] 마음을 건다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입력 : 2022. 11.04. 00:00:00

영화 '현수막'.

[한라일보] 윤혜성 감독의 단편 영화 '현수막'은 15년 전 사라졌던 언니가 남겨진 가족에게 다시 돌아온 그날의 하루를 담고 있는 영화다. 어느 날 갑자기 곁을 떠난 가족을 찾기 위해 남겨진 가족들은 곳곳에 현수막을 내건다. 막연하지만 간절했던 기대가 막막한 상심으로 바뀌어가는 지난한 시간이 흐르고 딸을 찾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다. 남겨진 동생과 어머니는 상심 속에서도 현수막을 내걸고 언니를, 딸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일은 포기하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에서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 핼러윈을 즐기러 이태원을 찾았던 생명들이 압사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사망자가 150명이 넘고 부상자를 합하면 300명이 넘는 믿을 수 없는 참사다. 코로나 시국으로 함께 모여 부대끼는 시간을 허락받지 못했던 이들은 들뜬 마음으로 거리로 몰려들었다. 당연히 불법도 아니었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도 아니었다. 축제의 거리는 넘치는 사람들로 붐볐고 음악 소리는 크게 울려 펴졌다. 올해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고 누구도 이 축제의 성격을 모르지 않았다. 분장을 했고 코스튬을 입었다. 누군가에게는 낯설 수 있는 문화일 수도 있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익숙하고 기다렸던 시공간이다. 그곳에서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비좁은 거리, 가파른 경사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다. 사고는 언제, 어디에서도 발생할 수 있지만 참사는 다르다. 예고된 군중들의 운집에도 불구하고 국민의 안전과 생명을 책임질 국가의 보호는 그 자리에 없었다. 경찰들의 숫자는 미미할 정도로 부족했고 마땅히 통제됐어야 할 도로는 차들로 가득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참사 이후의 대응이다. 책임져야 할 위치에 있는 모든 이들이 이 참사를 사고로 명명하고 희생자를 사망자로 호명하며 이 끔찍한 재난을 입은 이들을 외면하고 있다. 어찌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과 방법이 없었다는 무책임함은 전혀 다른 감정과 태도다. 잊지 못한 채 반복되는 이 나라의 인재는 직접적인 희생자가 아닌 모든 국민들을 또 다시 깊은 수렁 속으로 밀어 넣고 있다.

참사 후 거리 곳곳에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어떤 현수막에는 '사고로 목숨을 잃은 사망자'라고 쓰여 있고 어떤 현수막에는 '참사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라고 쓰여 있다. 과연 이 애도는 같은 것일까. 자신의 책임을 지우기 위해 정확한 호명을 하지 못하는 마음이 과연 누군가의 죽음에 합당한 위로일까.

영화 '현수막'에서 돌아오지 않는 언니를 기다리던 동생은 긴 시간 현수막을 돌본다. 너무 어린 시절 헤어진 언니지만 언니를 기다리다 먼저 세상을 떠난 아빠와 여전히 언니를 기다리는 엄마를 생각하며 마치 루틴처럼 곳곳에 걸어 놓은 현수막의 안위를 살핀다. 동생에게 언니와 함께했던 시간은 언니와 헤어져 있던 시간에 비교하자면 이제 한 줌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언니가 돌아온다. 거짓말 같기도 하고 기적 같기도 한 언니의 귀환은 현수막처럼 흔들리지 않던 동생의 마음을 흔든다. 밉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언니와 함께 내걸었던 현수막을 다시 회수하며 동생은 자신의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잃어버린 것과 잊지 못하는 것 사이에 놓였던 이들의 관계는 희미하게 비추는 햇살처럼 회복의 기미를 띤다.

끔찍한 참사 후 국가는 일방적으로 애도 기간을 정했다. 많은 이들의 일상이 갑작스레 멈춤을 강요당하고 있고 사과도, 진상 규명도 없는 형식적인 겉치레 만이 슬픔과 분노 위를 둘러싸고 있다. 어떤 현수막들은 사라질 것이고 어떤 현수막들은 남아 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 해결이 되는 일도 있을 것이고 여전히 미결로 남는 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간절함으로 스스로가 현수막에 새긴 마음을 잊지는 못할 것이다. 어떤 마음을 새겼는지 그 현수막을 걸었던 이들은 정확히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참사의 희생자들을 사고의 사망자로 표기한 현수막들을 마음속에서 찢었다. 그 현수막들은 누군가의 마음으로 만들어져 걸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참사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명복을 빈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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