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애프터 양' 좋았던 것만 기억할게. 안타깝지만 지킬 수 없는 다짐이다. 다 잊고 다시 시작하겠어. 역시 불투명한 결심이다. 기억은 잊으려 노력할수록 잊히지 않는다. 까맣게 지웠다고 생각하지만 희미한 별처럼 빛나는 것, 찰나의 순간에서 순식간에 아득히 먼 과거의 자리로 데려다 놓는 것. 우리 인간은 이 강력하고 불가사의한 힘을 지닌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이 기억은 비단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것일까. '콜럼버스'와 '파친코'를 연출한 코고나다 감독의 영화 '애프터 양'은 어느 날 작동을 멈춘 안드로이드 '양'에게서 발견된 기억 저장소를 두고 벌어지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인간과는 달리 질병과 노화에서 자유로운 안드로이드 인간의 유한성은 그가 작동을 멈추자 현실화된다. 무던하고 탁월한 구성원이었던 양이 사라진 자리에서 가족들은 그를 쉽게 대체하지 못한다. 양을 대신할 안드로이드 인간들이 있지만 차선을 택할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이제 양과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양은 오로지 양으로만 존재한다. 누군가와 함께 어떤 시간을 공유했다는 것은 기억의 저장고를 함께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들은 같은 시간을 넣고 같은 추억을 꺼낸 사이다. 양이 떠난 뒤 가족들은 양이 남기고 간 것들을 통해 양과 함께했던 저장고를 열어 보게 된다. 그리고 안드로이드 인간 양의 저장고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이 담겨 있다. 안드로이드 인간 양은 어떤 순간들을 담아 놓았을까. 그 순간들로 무엇을 남기고 싶었을까. 삶의 처음과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안드로이드 인간 양이 떠난 뒤 그가 기억에 남긴 것들은 사소하고 방대하다. 마치 드넓은 백사장에 숨어 있는 조개껍질처럼, 깊은 숲 속에 떨어진 오래된 수피처럼 양의 기억들은 인간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양의 기억은 영겁의 세월이라는 인간적인 영역에도 신비롭게 맞닿아 있다. 양은 멈췄지만 양이 남긴 것들은 양과 함께한 이들의 기억을 통째로 뒤흔들어 남은 이들의 삶을 움직이게 한다. 언젠가 그들은 양을 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나눈 어떤 기억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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