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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觀] 잊은 줄 알았었는데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입력 : 2022. 06.10. 00:00:00

영화 '애프터 양'

좋았던 것만 기억할게. 안타깝지만 지킬 수 없는 다짐이다. 다 잊고 다시 시작하겠어. 역시 불투명한 결심이다. 기억은 잊으려 노력할수록 잊히지 않는다. 까맣게 지웠다고 생각하지만 희미한 별처럼 빛나는 것, 찰나의 순간에서 순식간에 아득히 먼 과거의 자리로 데려다 놓는 것. 우리 인간은 이 강력하고 불가사의한 힘을 지닌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이 기억은 비단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것일까.

'콜럼버스'와 '파친코'를 연출한 코고나다 감독의 영화 '애프터 양'은 어느 날 작동을 멈춘 안드로이드 '양'에게서 발견된 기억 저장소를 두고 벌어지는 한 가족의 이야기이다. 인간과는 달리 질병과 노화에서 자유로운 안드로이드 인간의 유한성은 그가 작동을 멈추자 현실화된다. 무던하고 탁월한 구성원이었던 양이 사라진 자리에서 가족들은 그를 쉽게 대체하지 못한다. 양을 대신할 안드로이드 인간들이 있지만 차선을 택할 수 없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들은 이제 양과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양은 오로지 양으로만 존재한다. 누군가와 함께 어떤 시간을 공유했다는 것은 기억의 저장고를 함께 사용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들은 같은 시간을 넣고 같은 추억을 꺼낸 사이다. 양이 떠난 뒤 가족들은 양이 남기고 간 것들을 통해 양과 함께했던 저장고를 열어 보게 된다. 그리고 안드로이드 인간 양의 저장고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수많은 기억의 조각들이 담겨 있다. 안드로이드 인간 양은 어떤 순간들을 담아 놓았을까. 그 순간들로 무엇을 남기고 싶었을까.

'애프터 양'은 '카메라의 렌즈를 통해서 삶을 들여다보는'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을 통해 기억이라는, 데이터로만 측정할 수 없는 감정의 영역을 차분하게 살펴 가는 영화다. 전작 '콜럼버스'에서도 마치 에세이 영화 같은 섬세한 구성력과 연출력을 선보였던 코고나다 감독은 '애프터 양'을 통해 매우 독창적이면서 서정적인 SF 영화인 동시에 사색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아트필름을 완성해냈다. SF영화 특유의 메탈릭한 질감에서 자유로운 '애프터 양'은 기억과 망각, 존재와 부재, 빛과 어둠이라는 대조적인 개념들의 사이를 마치 산책하듯 걸어 나가며 인상적인 삶의 조각들을 표본처럼 채집하는 영화다. 번쩍이는 화려함은 없지만 사소하게 반짝이는 순간들을 절묘하게 표착해내는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삼림욕을 한 것 같은 기분, 잘 우려진 차 한 잔을 마신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는데 이는 시각적인 것에만 국한되지 않고 후각과 청각 등 공감각적인 장치들이 극 전체에 튀지 않게 어우러진 덕이다. 또한 코고나다 감독은 스크린의 프레임을 누구보다 아름답게 사용하는 감독이기도 하다. '애프터 양'의 화면은 때로는 기억이라는 주제로 그려진 거대한 화폭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수많은 시어들이 수놓아진 책의 한 페이지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은 적극적인 관객들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애프터 양'은 느리게 걷고 자주 멈추며 작은 소리로 말하는 말수가 적은 가이드 같은 영화이기 때문이다.

삶의 처음과 끝을 짐작하기 어려운 안드로이드 인간 양이 떠난 뒤 그가 기억에 남긴 것들은 사소하고 방대하다. 마치 드넓은 백사장에 숨어 있는 조개껍질처럼, 깊은 숲 속에 떨어진 오래된 수피처럼 양의 기억들은 인간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또한 양의 기억은 영겁의 세월이라는 인간적인 영역에도 신비롭게 맞닿아 있다. 양은 멈췄지만 양이 남긴 것들은 양과 함께한 이들의 기억을 통째로 뒤흔들어 남은 이들의 삶을 움직이게 한다. 언젠가 그들은 양을 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나눈 어떤 기억도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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