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성산리는 제주섬에서 맨 처음 햇살을 맞는 마을이다. /그림=강부언 일제강점기때 지리적 여건 영향 발전 기틀 마련 '씨름대회사건'·주민 착취 따른 반일감정도 팽배 성산리는 제주섬에서 맨 처음 햇살을 맞는 마을이다. 동녁바다에서 불끈 솟아로른 해는 성산일출봉을 황금빛으로 채색한 뒤 그 광휘로운 햇살을 온 섬을 향해 펼쳐놓는다. 그래서 수천, 수만명의 도민과 관광객들은 매년 일출봉에서 떠오르는 새해 첫 해를 보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그리고 자신과 가족, 나라의 무사태평을 기원한다. 성산리는 신양리, 고성리, 오조리, 시흥리 등과 이웃해 있는 마을이다. 우도와는 소리쳐 부르면 응답할 것처럼 가깝게 마주하고 있다. 성산반도의 첨단에 돌출해 있는 거대한 암벽의 일출봉은 성산마을의 진산(鎭山)인 동시에 주변 마을을 한껏 돋보이게 하는 구실을 한다. 일출봉이 있음으로 해서 제주섬의 동쪽은 넉넉한 풍광을 거느리게 된 것이다. ![]() ▲성산리는 지난 2007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자연유산지구인 '제주 화산섬, 용암동굴'을 거느린 마을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사진은 성산 철새 도래지. /사진=강희만기자 성산리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은 꽤 오래전부터 나타나고 있다. 성산리 오정개 일대의 유물산포지에서는 탐라전기의 적갈색 토기가 나타나고 있다. 1,000년을 훌쩍 뛰어넘는 오래전부터 이 일대에서 사람이 살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성산은 조선시대에 '성산진성(城山鎭城)'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이경록목사가 1597년(선조 30) 수산방호소를 성산일출봉 밑 지금의 주차장으로 옮긴다. 그 이유는 왜구가 침입해 오면 성산을 최후의 보루지로 삼고자 했기 때문이다. 얼핏 생각하면 천연의 요새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2000여자, 높이 9자의 성산성을 쌓았다. 그러나 성산진은 1599년 목사 성윤문에 의해 다시 수산으로 옮긴다. 불과 3년 만의 일이다. 왜 그랬을까. 성내에는 빗물을 담아내기 위한 못을 파기도 했지만 물이 없어 성밖 1리의 물을 길어다 써야 했고 방어하기가 어렵다는 이유였다. 이에 대해 1601년 제주를 찾은 뒤 옛 성산진성에서 하루를 묵었던 김상헌은 "(이경록목사가 성산으로 진성을 옮긴 것은) 최하의 계책"이라고 평가했다. 왜구가 침입할 경우 이를 제압하기 보다 스스로 옥에 갇히는 계략, 일종의 자충수(自充數)라는 나무람이었다. 조선시대에 정의현의 고성리에 속했던 성산은 19세기에 이르러 고성리에서 분리된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일본과 가까운 지리적 여건과 풍부한 해산물, 양항으로 인해 빠르게 변모하기 시작한다. 일본인들이 대거 성산으로 입주하면서 통조림공장, 감태공장 등이 들어서고 이를 일본으로 실어나르기 위한 항만도 갖추게 된다. 일본인 자녀들만 다니던 '성산포동공립심상소학교'도 설립됐다. 이 학교는 1972년 교사의 노후와 협소로 인해 일출봉 기슭의 성산리 114번지로 옮기게 된다. 이 학교는 다시 1988년 지금의 위치(성산리 333번지)로 이설하게 된다. 성산리는 일제강점기에 외형적으로는 급속한 발전을 이룬 것처럼 비치지만 주민들은 오히려 더 많은 수탈과 강압을 받아야 했다. 1927년 발생한 성산 청년들과 일본인 선원들 간에 벌어졌던 '씨름대회사건'으로 주민 몇몇은 옥고까지 치러야 했다. 또 1930년 성산리 잠수와 주민대표들이 수확한 해산물의 수탈에 항의하며 도지사에 탄원하고 항의방문한 일들은 그 후 1932년 구좌읍을 중심으로 발생한 해녀항일투쟁의 불씨가 되었다고 할 것이다. 성산리는 지난 2007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자연유산지구인 '제주 화산섬, 용암동굴'을 거느린 마을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아침 해를 맨 먼저 받는 성산리가 이를 계기로 역사적 아픔과 시련을 딛고 제주섬을 밝혀주는 마을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인지 많은 이들은 기대속에 이를 주시하고 있다. /글=강문규기자 성산리와 '르클레지오' 이야기 '4·3의 광풍'이 온 섬을 휩쓸던 시절 어디 하나 상처를 입지 않은 마을이 없었다. 성산리도 그랬다. 노인들에게 서북청년 특별중대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악몽으로 남아 있다. 그들은 성산읍과 구좌읍을 관할하며 툭하면 주민들을 잡아가 혹독하게 고문하다 대부분 총살했다. 그 장소가 성산리의 '터진못'과 '우뭇개동산'이다. 주민들은 날마다 잡혀 갔던 혈육과 친지들의 고문받는 비명을 들으며 몸서리치거나 총살 당한 시체를 안고 울부짖어야 했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일출봉 해안에서 벌어진 이 처참한 슬픔과 분노의 역사는 시간과 더불어 뇌리속에 사라질 것인가.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르클레지오'는 제주를 돌아보며 매력과 환상적인 섬 곳곳에서 베어나는 우수의 빛깔을 놓치지 않았다. 지난 3월 프랑스판 지오(GEO)에 실린 그의 여행기 '제주의 매력에 빠진 르클레지오'를 다시 펼쳐든다. "섬에는 우수가 있다. 이게 어디에서 나오는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이 마음을 갑갑하게 만드는 이유다.(중략) 오늘날 제주는 온화함과 가혹함, 슬픔과 기쁨의 혼합이다. 검정과 초록의 혼합, 이 섬의 우수는 섬 동쪽 끝 성산일출봉에서 잘 느낄 수 있다. 이 봉우리는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 보고 선 가파른 검정이다. 성산일출봉을 보고 있노라면 마다가스카르 동쪽의 화산섬 마우리티우스의 모른봉이 떠오른다. 똑같은 비극을 담고 있다. 성산일출봉은 제주 4·3사건 때 민병대에 끌려온 성산마을 주민들이 죽어가면서 봤던 바로 그곳이다. (중략) 오늘날 냉전의 기억은 사라졌다. 아이들은 그 바다위에서 멱을 감고 자기 조상이 피를 흘린 해변에서 논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성산마을의 한 여인이 경찰에 끌려가는 것을 봤다. 남편의 시신을 찾지 못한채 몇달이 지나갔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혼자사는 여인의 삶은 고달팠다. 그러나 운명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경찰 중 한명이 그와 사랑에 빠져 청혼을 했다. 고통스러웠지만 그 여인은 받아들였다. 경찰은 그가 처형했던 남자의 아이를 키우고 자기 아이처럼 사랑했다. 이 감동적이면서 잔인한 역사, 슬프면서도 삶의 욕구로 가득 찬 철학이 제주의 영혼이다"라고 르클레지오는 쓰고 있다. 성산은 그런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마을이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이 기사는 한라일보 인터넷 홈페이지(http://www.ihalla.com)에서
프린트 되었습니다. 문의 메일 : webmaster@ihalla.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