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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월진성은 조선시대 제주에 세워졌던 3성(城)과 9진(鎭)의 하나로 다른 진에 비해 풍요로웠던 곳이다. 명월대와 같은 유적이 남아있는 것도 선비들의 풍요문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림=강부언화백 부유한 백성·샘물 등 제주의 9진중 으뜸 "복원사업 진척… 역사교육·보존" 다행 어느 곳이든 성에는 후세들이 기억해야 할 역사의 파편들이 묻혀 있다. 명월진성도 그런 곳이다. 명월진성은 한림읍 동명리에 위치해 있다. 남쪽은 월림리, 서쪽은 금능리, 그리고 북쪽은 한림리가 펼쳐져 있다. 명월진은 둘레 1,360m이며 북서와 남동방향으로 장축을 갖는 타원형의 성으로 전체적인 지형은 남쪽은 지대가 높고 북쪽은 낮은 지형에 자리잡고 있다. 명월진은 조선조 제주에 설치되었던 3성 9진의 하나다. 즉 제주목, 정의, 대정 등 3읍성과 함께 화북, 조천, 별방, 수산, 서귀, 모슬, 차귀, 애월과 더불어 9진의 하나였던 곳이다. 이들 진성은 수산진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해안에 설치되었다. 즉 왜구에 대비한 것이다. 이러한 방어체계는 고려시대부터 구축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원종 14년(1273) 삼별초를 진압하기 위해 제주에 내려 온 여몽연합군의 상륙전을 지휘하던 김방경과 혼도는 좌군 30여 척을 명월포로 상륙하는 것처럼 가장한 뒤 주력부대인 중군을 함덕포로 상륙했다. 이 때 삼별초는 명월포로 군사를 배치하는 전술상의 오판을 함으로써 패전을 자초하게 된다. 1374년(공민왕 23)에는 목호(牧胡)들의 반란을 진압한 최영 장군이 명월포를 통해 돌아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명월진 남문 동쪽의 옹성에 오르면 주변의 지형지세가 한눈에 조망되면서 이러한 역사가 어제인 듯 머리를 스친다. 1510년(중종 5)에 장림 목사가 이곳에 목성(木城)을 처음 세운 것도 비양도가 가까이 있어 왜구가 접근하기 좋은 곳이라는 판단에서 였다. 이형상 목사가 1702년 지방을 순력하며 남긴 '탐라순력도'에 수록된 '명월조점(明月操點)'을 보면 당시 명월진성과 그 주변의 상황이 드러난다. 성내의 주요 관아건물은 서남쪽으로 집중 배치돼 있다. 이는 유사시 바다로 침입하는 왜구에 대비하기 위한 배치라고 할 수 있다. 동남쪽에는 별다른 관아시설은 없고 목마를 키우거나 사장(射場)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 ▲탐라순력도 중 '명월조점'으로 당시 명월진의 관아배치와 주변 촌락 등을 옅볼 수 있다. 1901년에 발생한 이재수난(또는 辛丑敎亂)은 제주섬을 진동시키며 많은 사상자(또는 순교자)를 발생케 했던 한말의 비극적 사건이었다. 이에 관한 자료는 '김윤식의 속음청사', 라크루(구마슬) 신부의 '신축교안 보고', '이재호 제주목사 보고서', '평리원 판결문(오대현의 최후 진술)',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인 '제주도민봉기의 건' 등으로 남아 있다. 이들 자료를 종합해 보면 그 해 5월 5~6일 세폐(稅弊)와 교폐(敎弊)의 시정을 대정군민들이 제주목사에게 호소하기 위해 향임인 오대현을 장두로 삼아 제주로 향하면서 발생한다. 이들 민중이 한림동에 이를 무렵 소식을 들은 교인들은 도민파에 대해 선제공격에 나서기로 하고 5월 14일 도민파가 모여 있는 명월을 공격하게 된다. 이들 교인 수백명은 각각 총칼을 들고 민회(도민파가 집결해 있는 곳)을 향하여 총을 쏘아 몇 사람이 중상을 입었다. 이 때 오대현도 붙잡혔다. 기세가 오른 교인파는 곧바로 대정으로 들어가 군기를 꺼내어 성으로 몰려드는 민중을 향하여 발포, 3~4인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다. 이에 총상을 보고 격분한 민중들은 산포수를 불러 모으고 대나무를 잘라 죽창을 만들어 군진(軍陳)을 편성하면서 급박한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던 것이다. 명월·한림에서 발생한 전투는 당초 세폐 등을 혁파해 줄 것을 요구하기 위한 시위가 교인파와 도민파 간에 무력으로 확산되는 전기가 되었다. 이를 통해 교인파의 기세는 한층 높아졌고, 도민파도 본격적으로 무력항쟁으로 접어들었다는 점에서 이 전투는 이재수난의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숱한 역사를 지켜 보았던 명월진성이 최근 들어 복원을 위한 사업들이 하나씩 진척되고 있음은 역사교육과 보존을 위해서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 ▲복원작업이 진행중인 명월진. 이 성에는 고려시대부터 조선후기의 양제해 옥사사건, 이재수난에 관련된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깃들어 있는 현장이다. /사진=강경민기자 gmkang@hallailbo.co.kr 조작한 탐관오리의 죄상 진실 밝혀 명월진성에는 또 다른 이야기도 간직하고 있다. 한말인 순조 13년(1813) 12월 제주에서 양제해의 옥사사건이 발생한다. 풍헌 양제해가 간리(奸吏)들의 학정을 시정하기 위한 등소(等訴)를 윤광종 등의 동조자들과 논의하게 됐다. 그런데 그 날 밤 윤광종이 이를 척결대상인 김재검에게 밀고함으로써 양제해 등 7인은 모반(謀叛)의 주역으로 몰려 옥사하게 되고 나머지는 유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의 진상은 지난해 현행복이 펴낸 '상찬계시말'과 그 후 박찬식, 김정기 등 사학자들에 의해 재평가되고 있다. 이는 반란을 획책한 역모가 아니라 김재검 등 탐관오리들이 자신들의 죄상을 덮기 위해 조작한 사건임이 새롭게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보다 앞서 1987년 발행된 '북제주군'지를 보면 '홍경래난의 제주의병과 양제해의 옥사'에 관한 흥미로운 기술이 있다. 양제해의 옥사 경위를 소개한 뒤 "여기에 양제해 옥사에 대해서는 후일에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즉, "사시(史氏)는 말하기를 '양제해옥사는 이 때 간리(奸吏)가 일을 보아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으므로 양제해와 윤광종이 사사로이 간리를 제거할 것을 의논하였다. 그런데 윤광종이 간리인 김재검(金載儉)에게 이를 누설하니 김재검이 변고를 주장하여 일어난 것이라 하였다. 윤광종에게는 그 공으로 명월만호(明月萬戶)를 제수하였으나 얼마 안가서 낙마하여 죽고, 성 앞에 장사하였으나 이번에는 성이 무너져 무덤을 내려 앉게 하였다. 또 김재검은 비록 죄는 면하였다고 하나 그 자식과 손자들이 간오(奸誤)로 죽으니 사람들은 천도(天道)에 거짓이 없다 하며 후세 소인배들을 족히 경계함이다'라고 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비록 지방관리들과 조정에서는 역모사건으로 조작하고 있지만 제주의 민중과 역사가들은 이를 거짓으로 보고 냉철하게 이를 비판해 왔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저작권자 © 한라일보 (http://www.ihalla.com) 무단전재 및 수집·재배포 금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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