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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세상] 그럼에도, 그렇기 때문에, 그래서 써야 했다
조애나 러스의 '여자들이 글 못 쓰게…'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입력 : 2021. 04.09. 00:00:00

어떻게 여성의 글 억압했나
11가지 항목서 반어적 분석

19세기 이전 글을 썼던 우리나라의 여성 작가들을 떠올려보자. 기껏해야 신사임당, 허난설헌 정도다. 그 시기에 글을 쓴 여성이 정말 그들밖에 없었을까. 설혹 현대에 이르러 여성들의 문단 진출이 늘었다고 해도 그들에겐 흔히 사랑 타령이다, 사회적 관점이 부재하다, 감정적이다, 내면세계에 치우쳐 있다와 같은 평가가 따라붙는다. 이 모든 시도에도 기어이 살아남는다면 그들은 '예외적인 특별한 경우'가 된다.

미국 태생의 페미니스트 SF 작가로 2011년 세상을 떠난 조애나 러스의 '여자들이 글 못 쓰게 만드는 방법'은 여성들의 글쓰기가 어떤 방식으로 억압되어 왔는지를 보여준다. 1970년대에 시작한 작업의 결과물로 1983년 초판이 나왔고 2018년 제사 크리스핀의 서문을 덧붙여 새롭게 출판됐다.

저자는 이 책에서 세련된 문학 비평의 언어들이 어떻게 여성의 글을 지우고 고립시켜 왔는지를 유머러스한 신랄함으로 파헤치고 있다. 그 여정을 좇다 보면 역사에서 지워졌던 여자들의 이름이 무수히 되살아난다. 버지니아 울프, 조지 엘리엇, 브론테 자매 등 한국 독자들에게 알려져 있는 이들도 있지만 생전 처음 들어보는 낯선 작가도 적지 않다.

영문학계에서 여성 작품을 무시하고 비난하거나 폄하하는 데 사용된 방법은 어떤 것일까. 러스는 11가지 항목을 통해 반어적으로 갖가지 사례를 분석하고 있는데 금지하기, 자기기만, 행위 주체성 부정하기, 행위 주체성 오염시키기, 이중 기준으로 평가하기, 잘못된 범주화, 고립시키기, 예외로 취급하기, 본보기 없애기, 회피하게 만들기, 미학적이지 않다고 보기가 그것이다. 이같은 방법의 근거를 제시하기 위해 저자는 몇 세기에 걸친 문헌들을 뒤졌고 그 결과 페이지마다 주석이 달리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오랜 기간 가정이라는 영역에서 한정된 삶을 살아야 했던 여성들에겐 그 한계를 넘어 자신의 실존을 알릴 수 있는 유일한 행위가 글쓰기였을 것이다. 여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래서 썼다. 대부분 남성 비평가들이 한 말과 태도를 그대로 가져와 그들 스스로 이중 잣대, 위선, 자기기만을 드러내도록 만든 러스는 말미에 "세상에는 어느 누가 알고 있는 것보다도 여자들이 쓴 좋은 문학이 훨씬 더 많이 존재한다는 신념이 자라났다"고 희망을 전했다. 박이은실 옮김. 낮은산. 1만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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