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영의 건강&생활] 내가 선택한 싸움

[이소영의 건강&생활] 내가 선택한 싸움
  • 입력 : 2024. 04.17(수) 00:00
  • 송문혁 기자 smhg1218@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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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최근에 의뢰받은 환자가 있다. 구순의 여성 환자가 갑자기 생긴 망상으로 정신과 진료가 필요하다고 했다. 망상이란 사실과 논리에 맞지 않는 잘못된 믿음이나 생각을 말한다. 허황된 망상은 문제가 되고 현실에 가까운 망상은 덜 문제가 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속으로 본인이 외계인이라 굳게 믿고 있더라도 지구에 있는 동안 정체를 숨기고 잘 지내야겠다고 생각하며 평범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면? 반면, 누군가가 내 물건을 훔친다고 생각해 죄 없는 타인을 밤낮으로 추궁하고 심지어 해하려 한다면? 절대적으로 후자가 정신과 치료와 법적 보호가 필요한 경우다.

환자는 단정한 차림에 환한 미소를 띤 점잖은 할머님이셨다. 얼마 전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살고 있는, 겉 보기로는 별문제가 보이지 않는 환자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지 모르겠네. 내 아들하고 주치의는 내 정신이 이상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하며 꺼낸 이야기는, 살고 있는 커다란 집의 위층에 누군가가 숨어들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들이 집안에 카메라를 설치해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지만 환자는 자신의 망상에 추호의 의심도 없어 보였다. 위층에 누가 산다는 게 무섭지 않느냐고 하니 처음엔 무서웠지만 자기를 해치려고 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어 이제는 괜찮단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어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언제 꼭 다시 보고 싶다고 하니 흔쾌히 석 달 후 다시 오겠다며 떠나셨다.

다음 날 환자의 주치의로부터 연락이 왔다. 멀쩡하던 분이 망상 증상을 보이고 있는데 아무것도 안 해주느냐는 거였다. 가족들도 난리가 났다. 주치의나 가족의 걱정은 나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당장 망상으로 인해 일어나는 문제가 없는 상황에서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치료를 강제할 수는 없다. 위층에 누가 산다고 믿고 있을 뿐, 잘 지내는 분을 정신과 폐쇄 병동에 강제로 입원시킬 것인가? 입원시킨다면 언제까지? 그뿐 아니라, 조현병과 같은 정신증에 효과가 있는 약들이 이런 경우에는 큰 효과가 없다.

의사마다 치료 전략이 다르겠지만 내가 경험으로 터득한 것은, 이럴 때는 오히려 환자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고 긍정도 부정도 아닌 입장을 취하며 관계를 잘 맺는 게 더 중요하다는 점이다. 그래야 언젠가 정말 어떠한 의학적 또는 법적 조치가 필요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환자가 나에게 돌아온다. 영어 표현 중에 "Pick your battles."라는 말이 있다. 싸움을 골라라, 즉, 중요하고 승산이 있는 싸움에 전력을 소모하라는 말이다. 지금은 환자와 내 말이 맞네, 네 말이 맞네, 싸울 때가 아니라 "다시 오실 거죠?"에 긍정적인 대답을 듣는 게 더 중요했던 것이다. 앞으로 이 환자의 망상이 저절로 사라질지, 더 심해질지, 아니면 다른 치매 증상이 나타날지는 모르겠다. 다만 환자가 겁을 먹고 치료를 거부하는 게 아니라 이 의사를 만나면 내 이야기를 들어준다, 내가 의지해도 되는 사람이다, 라는 믿음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이소영 미국 하버드대학교의과대학·브리검여성병원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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