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19)치자꽃 향기 - 박홍점

[황학주의 詩읽는 화요일] (19)치자꽃 향기 - 박홍점
  • 입력 : 2023. 05.16(화) 00:00  수정 : 2023. 05. 30(화) 10:33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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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자꽃 향기 - 박홍점

작년 여름에는

아기 주먹만한 꽃 툭툭 불거져

집안을 채우던 향기

연초에 투가리 같은 아내를 먼저 보내고

하루하루를 치자나무에 걸어두는 노인

살뜰한 남편은 아니었지만

집요한 눈길 뿌리치지 못했는지

천길 달려와

해거리 하려다 그만두고 딱 한 송이

한평생 무능력을 원망하며

돌아앉아

저 왠수 죽지도 않는다고 푸념하더니

마주 보고 앉아 무슨 얘기 나누는 걸까

꽃도 노인도 오금 저리는 오후

삽화=써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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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투가리도 되고 치자꽃도 되는 것은 내 '생각' 때문이지만 "하루하루를 치자나무에 걸어두는" 것은, 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아내의 죽음 때문이다. 그리고 그 죽음이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고정된 현실이 꿈의 여인처럼 치자꽃으로 변신하는 그 생각 속에서 남편은 못다 한 얘기를 마저 나눌 수 있다. 이 시에서 꽃과 노인이 오금을 저리는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 둘을 연결시켜 주며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은 잔허(殘墟)처럼 남은 희미한 사랑이다. 그런 자각과 방불한 것으로도 읽힌다. 내 사랑이 내 사랑을 피운다. 내 사랑만 확인된다면 '너'는 가장 아름다운 하얀 치자꽃이 되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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