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택의 한라칼럼] 임형수 제주목사와 영혜사 복원을 위하여

[문영택의 한라칼럼] 임형수 제주목사와 영혜사 복원을 위하여
  • 입력 : 2022. 04.05(화) 00:00
  •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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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시한경면 당산봉에 조성된 '제74대 제주목사 임형수 숭모원'을 다시 찾았다. 숭모원은 제주목사를 지낸 임형수의 탄생 500주년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평택임씨 입도조 임구'의 묘역 일대를 성역화 해 붙인 이름이다. 임구는 선친의 유훈으로 손자와 함께 제주에 건너와 살다 당산봉에 묻힌 임형수의 장자이다. 임형수는 제주목사 시절 송사를 엄정하게 행하고 특히 교육기관인 김녕정사와 월계정사를 개교한다. 호가 금호인 임형수가 남긴 '금호유고'에 실린 제주 관련 시 중 '관덕정(觀德亭 濟州)'이란 시를 소개한다.

"어려서부터 글과 덕을 쌓고 병법도 논하며(曾修文德又論兵), 백성의 아픔과 기쁨을 정 붙여 깊이 생각 하였네(長念民間苦樂情), 송사를 들을 때 늘 공자님 말씀 품고(聽訟常懷夫子語), 법을 다스릴 땐 백이의 청아함을 본 받는다네(典形每效伯夷淸), 사람의 재주를 알려면 말 타기와 활쏘기를 살피고(觀人才否御帿處), 올바름과 사악함을 심판할 땐 현의 어울림처럼 양쪽의 소리를 듣는다네.(審政正邪絃管聲), 우뚝 솟은 정자(관덕정)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突兀高亭今古在), (제주백성들은) 몇 번이나 어진 목사 만나 좋은 세상 만났을꼬.(幾經仁牧享治平)."

전남 나주 출신 임형수는 1545년 을사사화로 홍문관 부제학에서 좌천돼 제주목사로 부임하나 다음해 파직된다. 2년 후 벌어진 정미사화로 사사되니, 그의 나이 34세였다. 죽음 직전 임형수가 아들에게 '배우지 아니하면 무식하니, 배우기는 하되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라고 말하고는, 사약을 여러 번 마셨으나 죽지 않자 손수 목매 자결한다.

1567년 신원된 임형수는 제주에서의 선정으로 1850년 장인식 목사에 의해 영혜사(永惠祠)에 배향된다. 시대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며 선정을 베푼 목사들을 제향 하던 사당인 영혜사의 부침을 적는다. 오래전부터 제주에서는 선정을 펼친 이약동. 이괴.김정.이형상.김진용을, 이름 없는 '귤림서원 별사(別祠)'에 모셔 기리고 있었다. 그러다 1841년 이원조 목사가 이 별사에 상현사(象賢祠)라는 이름을 지어 붙인다. 1848년에는 장인식 목사에 의해 상현사는 영혜사로 이름이 바뀌고, 당시 제주에 유배 중이던 추사가 제액(題額)한다. 다음해에는 영혜사에 모시던 김진용을 1843년 이원조 목사가 세운 향현사로 옮겨, 고득종과 함께 제향한다. 그러다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향현사와 함께 영혜사는 폐지돼 오늘에 이른다.

임형수 제주목사와의 만남은 권력남용의 슬픈 역사문화와의 만남이지만, 한편으론 진정한 목민관을 만나는 소중한 해후이다. 향현사는 2007년 복원되지만, 영혜사는 아직도 복원돼 있지 않다. 어쩜 제주5현 이상으로 제주를 위해 목민관으로서의 치적을 남긴 이들을 모신 영혜사가 복원되기를 간절히 바라본다. <문영택 (사)질토래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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