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꿈을 모아서
  • 입력 : 2021. 10.08(금) 00:00
  •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꿈은 희망일까 절망일까, 욕망일까 원망일까. 어떤 꿈은 합당하고 어떤 꿈은 부당한가. 꿈의 기한은 스스로가 정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아니면 누구라도 붙잡고 아직도 꿈 꾸는 중인 것이 맞는지 물어봐야 하는 것일까. 주식 부자가 되는 꿈과 로또 당첨의 꿈은 오늘 밤 몇 명이 동시에 꾸고 있을까. 하루에도 몇 차례씩 참을 수 없이 궁금하고 가늠할 수 없는 거리에 있는듯한 이 꿈에 대해 생각한다. 어젯밤 찾아왔던 꿈 속의 전언들은 정오가 되기 전에 홀연히 사라지고 다시 자정이 될 때까지 허황되거나 호사스러운 꿈을 뜬구름 보듯 흘려 보내거나 소중하고 애틋한 꿈의 목록들을 꺼내어 한참을 마주 보기도 한다. 다시 자정이 된다고, 잠이 든다고 반드시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간절히 원한다고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 나의 요물, 나의 보물 나를 다그치고 나를 다독이는 나의 꿈. 그러니까 나는 어쩌면 우리는 매일을 꿈 꾸듯이 산다기 보다는 아마도 매일 추가되거나 사라지는 꿈을 어떻게든 꾸려가며 사는 것 같다. 보따리를 늘려가며 몇 그램일지 모를 작고 큰 꿈들의 무게를 감당해내면서 말이다.

영화 '투 올드 힙합 키드'와 '메이트'를 연출한 정대건 감독의 장편 소설 'GV빌런 고태경'은 영화라는 꿈에 대한 기록이자 다짐이다. 이 소설은 꿈의 결과였던 첫 장편 영화를 세상에 내보였으나 실패한 30대 중반의 영화 감독 조혜나와 50대가 될 때까지 첫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을 포기하지 않고 간직한 관객 고태경이 극장에서 만나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감독 조혜나는 실패작으로 여기고 있는 자신의 첫 작품의 상영 후 열린 GV(관객과의 대화)현장에서 뼈아픈 일침을 건네는, 그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불편한 관객 고태경을 만난다. 조혜나의 작품 뿐만 아니라 아주 많은 영화들의 GV현장마다 출몰해 창작자들에게 매서운 질문을 건네 'GV 빌런'이라는 호칭을 얻은 관객 고태경. 조혜나는 고태경을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어 보겠다는 갑작스러운 꿈에 발동을 건다.

조혜나와 고태경 두 사람은 마치 다른 차선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한 방향의 차들처럼 다르지만 닮아 있다. 영화를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방법에 차이가 있고 꿈과의 인연을 이어 가지만 그 꿈에게 안부를 묻는 간격이 다르다. 패기를 잃어버린 조혜나와 포기를 잊어 버린 고태경 이 두사람의 여정은 흥미롭다. 다소 치기 어린 조혜나의 호기심으로 시작된 둘의 관계는 어떤 난관이 있어도 영화를 완성하겠다는 마음의 합의 후 점차 서로를 의지하고 응원하고 지켜보는 항해가 되어간다. 꿈이라는 망망대해, 영화라는 보물선을 찾아가는 이들의 동행은 단팥죽처럼 달고 따뜻한데 그건 같은 곳을 바라보다 결국 서로를 마주보는 이 소설의 여정이 절망의 다음 페이지가 희망일 수도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고 서로의 꿈을 격려하고 응원하고 있어서다.

꿈에 길을 묻다가 그 꿈을 마음에 묻으면 얼마나 눈물이 나는지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자신만의 서랍에 넣어둔 곱고 서러운 그 꿈에게 다시 빛을 비추어 주려면 나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할 때가 많다, 그런 때에는 오랜 시간 영근 둥근 달의 도움이 필요하다. 김초희 감독의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내몰리고 미뤄뒀던 꿈에게 다시 비춰지는 만월의 기적 같은 영화다. 집도 없고 남자도 없고 일마저 끊겨 버린 40대의 영화 프로듀서 찬실. 어쩔 수 없이 꿈이자 생계였던 영화를 포기한 그녀는 가사 도우미로 일자리를 구하고 낯선 달동네의 작은 방에서 새로운 살림을 꾸린다. 어떻게든 붙들고 있던 꿈과 직업을 다 포기했는데 이상하게도 그녀는 더 자주 꿈의 모서리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덮어두었던 찬실의 꿈은 다정한 사람들의 도움으로 기력을 차리고 환영 같은 기억의 방문들로 생기를 얻는다. 그리고 놀랍게도 점차 덮어놓았던 꿈의 형체가 다시 반짝이게 시작한다. 따뜻한 관계의 호출 덕에 자신도 모르게 만기된 꿈의 알람들이 그녀의 일상에 울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모두의 꿈에게는 각자의 동지가 필요하다. 잘 지내고 있는지 어디 아프거나 불편한 데는 없는지 함께 가는 이 길이 즐겁고 안전한지를 물어봐 줄 사람들. 고민을 털어놓고 함께 꿈꾸는 일의 즐거움을 안내해 줄 친구들 없이 독립된 꿈은 자주 외롭거나 서럽다. 꿈의 실현이 성공이나 결과치 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꿈의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느낄 때 그 과정에서 잡았던 손들, 받았던 마음들 이야말로 잊지 못할 꿈의 흔적들이 되곤 한다. 나의 꿈과 당신의 꿈을 모아 망망대해의 보물선을 찾아내고 보름달의 영험한 빛을 함께 받을 수 있는 그런 꿈의 동지들. 나와 같은 처지일 수 있는 그들의 안부를 물을 때는 오히려 성급함이 미덕일 수도 있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꿈 꾸고 있을 또 다른 조혜나와 고태경 그리고 찬실이들에게 'GV 빌런 고태경'의 말을 빌려 전한다. "어떻게 다 네 탓으로 해. 너하고 세상하고 반반하자"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3158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