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89)서귀포시 대정읍 신도1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89)서귀포시 대정읍 신도1리
녹남봉 지천에 연분홍 복사꽃 피어날 무릉도원 꿈꾸다
  • 입력 : 2016. 06.07(화) 00:00
  • 편집부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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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 서쪽 끝 해안도로에서 멀리 한라산이 보이는 농경지 풍경(위)과 녹남봉 오르는 길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과 신도리 바다(아래).

예부터 토질 비옥했던 곳… 도원지역서 분리 무릉리로
녹남봉 전망공간 조성 등 관광자원화 주민 숙원 사업
"평지많은 마을 농경지 상습 침수피해 해결 방법 없나"



서귀포시에서 가장 서쪽에 있는 마을이다. 신도2리와 신도3리가 형제처럼 이웃해 있다.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주여건과 행정적 편의에 의해 구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정상에 원형분화구가 있는 녹남봉에 올라 바라보면 평야지대처럼 방대한 농토와 길들이 보이고 신도1리만 해도 농토의 규모가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드넓은 평지나 농경지를 이르는 제주어로 '드르'라는 표현을 쓴다. 예로부터 제주에는 '첫째가 강정드르요, 둘째가 도원드르다'라고 하여 이 지역을 부르는 이름 도원리가 토질이 비옥하기로 유명했다.

도원리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살려 복사꽃으로 뒤덮이게 만들고 싶다는 녹남봉.

고남규(73) 노인회장을 비롯한 마을 어르신들의 이야기를 종합하면 1588년을 전후하여 이 도원이라고 하는 광범위한 지역에 인가가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어업을 중심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 살았지만 왜구들에 의해 포구를 중심으로 노략질 당하는 경우가 많아 포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이주하여 생활하기 시작했다. 녹남봉을 의지하여 20여 가구가 촌락을 이루게 되었으니 이것이 설촌의 시작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초기에 윤남못 등 식수원을 개정하고 삶의 터전을 이뤄나갔다. 대정현에 속해 있으면서 그 후 백여 년 동안 도원지역 범위가 동으로는 굽은악, 서쪽은 바다, 남으로는 일과리와 접한 '돈두악', 북으로는 두모와 접한 당산봉이 안쪽 지역이었다. 1730년을 전후하여 마을이 점차 커짐에 따라 구남무기 지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했으며, 1750년 경에는 곤물, 군물, 고분장도 등 여러 곳에 인가가 분산되기 시작한다. 이후 구남무기는 마을의 면모를 구체적으로 갖추어 중장이라 불렀으며, 이 무렵 현재 무릉2리 인향동에도 인가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전지동에도 촌락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점이다.

도예공방으로 활용하고 있는 옛 초등학교.

1800년이 다가오면서 중장이를 중심으로 마을이 크게 형성되어 무릉리가 분리되어 나간다. 그 이전에 이미 논깍(현재 신도2리)과 비자동(현재 신도3리) 지역이 분리되었다. 1914년 일제강점기, 구역관리에 난점으로 '신도'라는 명칭을 쓰면서 도원(桃源) 영역에 속해있던 인향동, 뱅두못, 전지동 등이 무릉리에 편입되었고, 한장동 일부가 고산리에 속하게 되면서 신도리라는 명칭에 속하는 경계가 확정되게 된다. 단순하게 무릉도원이라는 지역이 분리되어 하나는 무릉리가 되고, 하나는 도원리가 된 것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있지만 그 것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도원지역에서 분리되어 무릉이 있다는 것이다. 방대한 면적을 자랑하던 대촌락 도원리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작은 단위들로 분리되는 것을 알지 못하면 신도1리와 주변마을과의 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도원이라는 역사를 가진 지역이 가문이면 종가 같은 곳이다.

양병식 이장

마을의 인구수는 382명, 가구수는 185세대, 농경지가 대부분인 마을 면적이 890.7ha다. 이런 관계로 양병식(61) 이장이 전하는 당면 과제는 "비가 많이 올 때, 침수되는 밭을 보면 누구네 밭인지 뻔히 아는데 그 집에 죄를 지은 심정입니다. 이장이 행정에 가서 건의를 잘 못해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할까봐 노심초사 하게 되지요. 평지가 많은 농경지가 많다보니 배수사업이 가장 중요합니다. 행정 당국에서 좀 더 집중적으로 이 문제 해결에 나서주지 않는다면 침수 피해를 자주 입는 밭들은 매해 피해를 보게 되어 있는 현실입니다"였다. 흔히 맞춤형 농업 지원 대책이라는 행정당국의 구호가 신도1리에서는 허공에 떠도는 소리로 들렸다. 마을사업을 많이 했다. 자립마을육성사업으로 연꽃무지개 도원마을 조성을 비롯하여 지역공동체사업으로 무 세척장을 보유하고, 2011년부터 2016년까지를 사업기간으로 한 농림축산식품부 사업 무릉도원올레권역화에 뛰어들어 홍보센터를 신축했다. 마을 발전에 대한 의지가 엄청나다.

서귀포시 맨 서쪽에 있는 해안도로 바닷가. 평평한 암반 위에 모래가 올라와 있다.

신도1리 주민들이 가장 바라는 숙원 사업은 녹남봉을 관광자원화 할 수 있도록 정상에 전망공간을 만들어 서부지역 일대를 조망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행정에서 불가능 판정을 내리는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다른 마을, 다른 지역에도 있는 것을 녹남봉 정상에는 안된다는 판단에 분노에 가까운 절망감을 보였다. 이영준(48) 청년회장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도원이라는 지명을 가진 것은 복사꽃이라고 하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발전 전략은 마을이름에 걸맞게 복사꽃은 녹남봉 전체에 심어서 한 세대가 흐른 뒤에는 서부지역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름으로 인식되고 알려지게 해야 합니다.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지명을 관광자원화 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기울일 것입니다"라고 했다. 무릉도원(武陵桃源)은 한자문화권에서 이상향을 뜻한다. 파라다이스를 꿈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작은 소망이라도 불러일으킬 수 있는 힘이 있는 용어다. 마을 주민들은 묻고 있었다. '없는 것도 만들어서 관광자원으로 만드는 세상에 있는 것도 활용을 못하면 그저 농사만 짓고 살라는 이야기냐?' 젊은이들이 고향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서라도 권역사업에서 추구하는 6차산업 마인드가 정책적으로 현실화 되어야 한다. 마을 어르신들이 생각하는 공통적인 문제는 버스 교통편에 대한 것이었다. 마을버스라도 있어야 할 형편이라는 것. 새로운 대도로가 마을에서 바닷가 쪽에 생기면서 기존 일주도로는 마을 안길이 되다시피 했다. 농담반 진담반으로 오지가 된 느낌이라고 하고 있으니. 도원 생활권을 자랑하던 대규모 마을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노력동원의 효율성 중심으로 행정적 분할이 이뤄지다보니 지금의 형태를 만들었다. 결단력 있는 행정으로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녹남봉 전체가 복사꽃으로 모두 뒤덮일 수 있도록 대체조림사업에 나서야 한다. 행정당국이 규정만 부여잡고 있어서는 현실이 되지 않을 꿈이다.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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