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61)서귀포시 대정읍 구억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61)서귀포시 대정읍 구억리
변화의 소용돌이 한복판에 서 있는 도시를 품은 옹기마을
  • 입력 : 2015. 10.20(화) 00:00
  • 편집부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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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내에 위치해 있는 영어교육도시(위)와 멀리 모슬봉이 보이는 마을 전경(아래).

돌도끼와 돌칼이 발굴되는 등 유구한 역사 간직한 곳
4·3 당시 마을 불타고 주민 강제이주되는 아픔도 겪어
영어교육도시 계기 이주민과 상생 통한 마을발전 꾀해
지역민 "체험형 테마마을 위해 옹기박물관 건립 꿈꿔"



참으로 독특한 구조를 지닌 마을이다. 농촌 마을 속에 도시가 있으니. 면적의 40% 정도가 영어교육도시다. 마을 테두리 안에 이런 구조를 지닌 곳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구억리 사람들의 미래는 과거와 견주어 어떤 모습을 지니게 될 것인지 궁금했다. 아무리 변화 한다고 해도 역사는 있다. 강창근(74) 노인회장이 전하는 구억리의 유구한 역사는 가래동산에서 발견된 돌도끼와 돌칼 등을 통하지 않더라도 오래전부터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기록된 사료들을 종합하면 대정성 인근 수월이못이라는 곳에 300 여 가구가 모여서 살다가 일부가 구억리 지경으로 이주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이 시초였다는 것. 토심이 깊고 배수가 잘되는 지역이니 농작물 소출이 좋아서 마을이 번창했을 것이다. 1915년 이전 까지는 안성리 상동이라고 지칭하다가 이후에 구억리로 분리되었다. 마을 이름이 구억리가 된 연원은 현무암으로 맷돌을 만들어서 팔던 구석밭 지역에 암석을 캐서 작업하던 곳이 아홉 개였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했다.

노란빛깔 옹기가 생산되던 노랑골.

지금의 취락 지역은 4·3 이후에 지어진 집들이 대부분이다. 그 광풍의 시기에 마을은 소개 당하고 아랫마을로 강제 이주되어 살 수밖에 없었던 것. 구억리 마을 경계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주거 공간들은 보성리와 안성리 지역으로 심하게 쏠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농경의 토대는 그대로였지만 4·3은 마을공동체의 생활중심지역마저 이동시켜버린 결과를 가져왔다. 현재 행정적으로 빚어지는 난맥상은 심각하다. 새로운 주소를 적용하다보니 구억리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에 이주해서 살지만 주소는 다른 마을로 표기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과 행정의 엇박자 속에서도 구억리 마을 공동체가 추구하는 지향점은 놀랍도록 견고하다. 대표적인 것이 옹기마을의 자긍심.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 58-2호 '검은굴'이라는 가마와 제59-1호 노랑굴이 증명하는 옹기장들이 살던 마을이라는 것이다. 130년 전부터 돌가마에서 옹기를 구워 팔았던 사람들. 더욱 독특한 것은 노랑굴이다. 노란 빛깔을 내는 옹기가 생산되던 곳이어서 노랑굴이라는 명칭을 사용했다는 사실. 1100도가 넘는 열을 투입해야 가능한 노란 빛깔 옹기를 다루던 주민들은 허벅, 통개, 장태, 고소리, 병 등 다양한 일상 용기들을 만들어 가까운 대정읍성 주민들에게 납품하였을 것이다. 그 전통을 이어서 옹기전수관이 있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교육하고, 옹기만들기 체험을 통하여 볼거리, 즐길거리를 제공하고 체험형 농촌테마 관광마을로 성장하고자 고군분투 하고 있었다.

박영종 이장

박영종(54) 이장이 밝히는 구체적인 계획은 "이러한 옹기마을의 자긍심을 기반으로 제주옹기축제를 구억리에서 펼치고 싶습니다. 세계최고 수준의 면적을 자랑하는 옹기박물관을 건설한다는 포부는 마을 전체가 옹기전시장이 되는 그런 형태입니다." 전통적인 자산과 관련하여 강성동(40) 청년회장은 이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저희 어머니를 비롯하여 동네 할머니들이 만든 오메기술은 여타 어느 지역의 술맛보다 월등하게 좋다는 평을 듣는데 이를 계승하여 전수 할 수 있는 장치가 없습니다. 행정에서 나서서 저 분들이 살아있을 때 비법을 전수 할 수 있도록 지원이 이뤄졌으면 좋겠습니다. 무형문화재 발굴 차원에서 접근해주시면 더욱 고맙겠고." 전통주에 대한 관심을 가진 곳에서 구억리 만의 오메기술 맛을 이끌어준다면 마을공동체의 중요한 자산으로 자리잡을 것이라는 기대가 컸다.

영어교육도시의 길거리 풍경.

307세대에 700 명이 넘는 주민들이 꿈꾸는 미래는 결국 6차산업 마인드에 있었다. 영어교육도시라고 하는 마을 속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한 마을이다. 주민들의 의견은 이렇다. 도시적인 요인과 대비되는 농촌 환경을 어떻게 관리하고 지속적으로 보존해서 후세에까지 부가가치를 이어가게 할 것인가 하는 고민. 구억리의 발전 방향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현실 여건 반영하여 최상의 방안을 찾고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도시화 된 지역과 농촌지역이 공생발전 모델이 탄생 될 수 있어야 한다. 원주민과 이방인의 논리가 아니라. 서로의 가치를 존중하는 값진 모습에서 제주 발전의 미래를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구억리는 위대한 실험이 진행중이라 해야겠다. 스스로를 실험의 대상으로 한 궁극의 성공을 위하여. 도시를 품은 농촌마을의 위상이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

지금은 수초가 무성하지만 옛날 식수로도 사용했다는 다리논.

아름다운 사례가 있었다. 올해 6월 구억마을에 위치한 제주국제학교NLCS(노스런던컬리지에잇스쿨제주) 6학년 학생과 학부모들이 노인복지회관을 찾아와 점심식사를 만들어 대접하고 노인들의 쉼터인 복지회관과 주변을 청소하는 봉사활동을 하는 모습. 저들의 슬로건이 더욱 감동적이었다. '마을이 학교다.' 영어라는 가치만 가지고 세상을 온전하게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느낀 의식있는 학부모들이 도시에서 배우지 못하는 것을 '마을에서 배워라.' 얼마나 감동적인가. 제주가 보유한 마을공동체의 소중한 가치를 가볍게 여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중요한 경종을 울린 작은 미담이었다.

구억리가 가꿔온 자긍심이 영어교육도시라고 하는 글로벌 마인드와 만나서 제주의 숱한 마을 중에 가장 높은 세계적 인지도를 가진 마을로 빠르게 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런 포부가 녹아있는 마을 분위기를 느꼈다. 마을은 '살아왔고 살아갈 곳'이다. 구억리를 통하여 거대한 변화 앞에 당당하게 대응하는 상황인식을 느낀다. 담대한 변화 앞에서 균형잡힌 시각으로 오늘을 사는 구억리민들을 바라본다. 단순 명쾌한 명제를 떠올린다. '오늘도 역사가 된다.' 구억리의 오늘은 곧 구억리의 역사다. 누가 대신 써주거나 장난질 칠 수 없는.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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