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52)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52)제주시 조천읍 조천리
제주서 처음 "독립만세" 외쳤던 기개로 ‘웅비’ 꿈꾸는 마을
  • 입력 : 2015. 08.11(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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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리탑 언덕에서 내려다 본 마을전경(위)과 조천연대에서 연북정과 포구방향으로 바라본 전경(아래).

풍부한 생활용수 등 정주 여건 좋아 7개 자연마을 형성
지역사회 ‘자부심’ 대단… 출향 인사들 마을명예 중시
건강문화센터 건설 중단… "조천인에게 모멸감" 울분
주민들 "정겨운 해변환경 살려 실버타운 조성" 목표



새벽에 연북정을 찾았다. 마을 이름의 느낌을 얻고자 해서. 아침朝 하늘天, 아침 하늘은 어둠을 벗어나려는 빛들의 용트림이다. 이토록 웅장한 마을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항시 웅비를 꿈꿨을 것이다. 유치환의 시 '깃발'의 마지막 구절처럼 조천이라는 깃발을 맨 처음 마을 이름으로 정한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혹시 하늘이 내린 이름을 땅에서 주워 담은 것은 아닐까. 연유는 모르되 그 아침의 의미를 하늘에 닿게 한 함성이 있었다. 제주에서 가장 먼저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곳. 당시 조천오일장에서 수 백 명이 모여 미밋동산까지 행진하고 가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외쳤던 "대한독립만세". 불과 96년 전 일이다. 올해가 광복 70년. 만세 의미는 무엇인가. 조선왕조는 유가 사대부들이 기득권을 쥔 나라였다. 명의 제후국이라 자임하였기에 백성들은 '천세'까지 밖에 외칠 수 없게 하였다. 그러다가 고종이 황제국을 선언하며 대한제국을 표방하고 나선다. 황제가 있는 중국인과 일본인들처럼 만세를 외칠 수 있는 나라를 얻은 것이었다. 백성들의 자부심이 어떠했을까? 그 것도 잠시 한일합방으로 중국의 역할을 일본이 하게 된 형국이니 다시 탐관오리가 판치는 '천세'시절로 돌아갈 것 같은 불안감. 만세운동의 심정을 요약하면 "우리도 너희들처럼 만세를 외칠 수 있는 백성이다!" 자주독립이란 백성들의 자긍심에서 오는 것. '천세'까지 밖에 외치지 못하도록 했던 중국의 제후국 조선이 아니라 황제국인 대한제국의 백성 자격으로 미밋동산에 올라 독립선언문에 조천사람들은 만세로서 지지를 보냈을 것이다. 아름다운 행동주의였다. 조천사람들의 딱 부러진 기질도 큰 몫을 했고.

만세동산에서 동상의 모습으로 만난 조천사람들의 신념 가득한 표정.

섬 제주에서 전설과 역사가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이라는 자긍심이 있다. 조천은 마을 풍경보다 사람들의 흔적이 먼저 떠오르는 마을이다. 오래된 비석들이 즐비한 마을.

한희규(81) 노인회장이 밝히는 설촌의 시작은 '엄씨와 장씨 집안이 먼저 들어와서 지금의 엉장매(일명 엄장매) 부근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설문대 할망이 육지까지 다리를 놓기 위해 바닷가에 돌을 쌓기 시작하다가 그만두었다는 전설이 남아있는 곳이기도 한 엉장매. 전설을 뒤로하고 역사적으로 세종 21년 1439년 이전에 이미 조천관이 설치되어 있었다. 조천포구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호소로써 군진의 기능 또한 수행하는 시설이었던 것. 해변구조가 만처럼 육지로 깊이 들어와 았는 형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일찍부터 포구로써의 기능을 수행 할 수 있는 자연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화북포와 함께 제주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던 조천포를 통하여 얼마나 많은 유배객들이 들어오고 진상품들이 나갔을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살고 있는 지역이기에 더욱 중요성이 부각되었을 것이다. 마을 어르신들이 생각하는 자부심 중에 하나가 '물 나는디 사름덜 난다.' 조천리 해안가에만 33개의 용천수가 솟아나고 있으니 생활용수를 기반으로 정주여건이 마련되었다는 의미다.

조상대대로 생명수였던 바닷가 용천수와 연북정, 그리고 조천진성.

7개의 자연마을이 모여 5000명이나 사는 거대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사름덜 난다'라는 의미는 지극히 중의적이다. 걸출한 인물이 많이 태어난다는 의미라고 해야겠다. 태어나면 무엇 하랴, 마을의 문화적 풍토가 동량으로 키워내야 하는 것. 조천리 출신들이 세상에 나가 크게 된 사람들이 많은 것은 조천리가 지닌 엄격한 마을 성격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조천출신 출향인사들이 각계각층에서 마을의 명예를 걸고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을 자주 목격하게 되는 것도 조천이 지닌 깊이 있는 역사성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

이현철 이장

조천읍 소재지 조천리에 암담한 현실이 있었다. 이현철(50) 이장의 주장은 "읍의 중심적 역할에 합당한 시설 마련을 위하여 일심단결로 숙원사업인 조천리 건강문화센터를 진행해왔습니다. 10억원이 넘는 자부담 마련에 마을 재산을 팔고 기금모금 운동까지 해가며 도비 지원을 얻어냈지만 건축과정에서 절차적 미숙을 감사 받게 되자 예산지원의 형평성까지 들고 나와 공사가 중단된 상태입니다. 도정이 바뀌니까 이런 억울한 상황을 맞게 되는군요." 행정의 연속성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었다. 사람이 잘못한 것이 있다면 문책하고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면 되는 것을. 건물이 문책을 받고 공사 중단 상태를 빚고 있는 것은 조천사람들에게 크나 큰 모멸감을 주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이익을 위한 시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민선 5기 도정과 6기 도정이 다른 판단을 하는 것에 분개하고 남음이 있었다. 행정적 절차에서 온 문제로 조천리 주민들의 행복추구권을 박탈할 권리는 어떤 공직자도 가지고 있지 않다.

공사진행중에 보조금 형평성을 문제삼아 공사가 중단된 건강문화센터 현장.

단란주점과 다방이 없는 마을 조천리. 장사가 될 수가 없을 것이다. 마을공동체의 눈총이 엄격하게 살아있어서. 이런 마을 분위기에서 성장한 유건호(38) 상임부회장이 마을 발전에 대한 비전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오밀조밀하고 정겨운 해변 환경을 살려서 세계적인 실버타운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지금 살고 있는 허름한 집들을 마을 공동체가 사업적 마인드를 가지고 매입하고 이주해서 살아갈 최신식 건물을 지어드리는 방법으로 여건을 만들어 가면 됩니다." 조천 해변이 지닌 자연적 강점을 살리겠다는 생각. 부모 세대가 민자유치와 같은 형태로 난개발을 자행했다면 아들 딸들의 세대에서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지속 가능이라는 용어를 이미 조천사람들은 그 역사의 두께로 훤히 꿰뚫고 있었던 모양이다. 광복 100년이 되는 30년 뒤, 조천 만세정신은 어떤 모습으로 조천을 바꿔 나갈까? 조천의 뚝심이 제주인의 모델이 되어있을 것이다.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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