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51)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탐방](51)제주시 한림읍 명월리
수령 500년 팽나무가 즐비한 제주섬 대표적 양반마을
  • 입력 : 2015. 08.04(화)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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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오름에서 비양도 방향으로 바라본 마을전경(위)과 명월성 누각과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성담(아래).

중산간 목축지대에서부터 해안까지 연결된 대촌
왜구 노략질 막기위해 명월진성 쌓은 전략적 요충지
1942년 발표한 노래 '찔레꽃' 가수 백난아의 고향
주민들 ‘역사와 문화 살아있는 명월리 만들기’ 열성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사무치게 불러온 노래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 고향. 언덕 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백난아(본명 오금숙)가 1942년 발표한 찔레꽃이다. 고향 명월리의 그 초가삼간은 4·3 때 불타서 찾을 길 없지만 아직도 그 멜로디는 우리들 가슴 속에 남아있다. 옛 선비들이 시를 읊던 명월대(제주도 기념물 제7호)에 올라 홀로 찔레꽃을 흥얼거려봤다. 홍예교 두 개의 아치가 필자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는 듯하다. 제주를 떠나 전국을 무대로 활동하던 가수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남달랐을 것이다. 고향사람들이 그녀가 작고한 후에 노래비를 세우고 영혼을 고향 명월리의 품에서 안식하도록 했다.

60여 그루나 되는 수령 500년 팽나무가 하천 양쪽을 따라 늘어서 있다.

1600년 이전까지 명월리의 영역은 지금의 금악리, 동명리, 상명리, 옹포리를 모두 합친 마을이었다. 실로 대촌의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중산간 목축지대에서부터 옹포의 해산물까지 생존에 필요한 여러 요소를 포괄하는 하나의 생활 권역이었으리라. 완만하게 동고서저형으로 바다에 이르는 지형임에도 유난히 들판을 이르는 지명이 많다. 진드르, 궷드르, 막개낭드르, 논머릿드르, 미내기드르, 주근지드르, 소리드르. 그만큼 개간하여 밭으로 만들어서 생존의 터전으로 삼을 만한 여건이 제공되었다는 뜻이다. 풍수지리 논리가 지배하던 시기에 산불근해불근(山不近海不近)의 명당이라는 곳. 섬 제주의 대표적인 양반촌의 명성 또한 후손 대대로 번성을 염원하는 풍수사상에 기반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유교적 세계관이 둥지를 틀기에 적합한 마을. 오히려 현실성을 바탕으로 하는 역사적 사실로 보더라도 이 거대한 마을의 형성은 필연이었다. 비양도에 왜선들이 출몰하여 노략질 하는 경우가 빈번하니 방어가 용이한 지형을 찾아야 했다. 해안에서 일정 거리가 떨어져 있으면서도 바다를 조망하기 용이하여 유사시에 격퇴가 수월한 지점을 택해야 했던 군사적 선택도 명월리의 설촌과 번성에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인구밀도가 높았던 지역에 진성을 쌓고 방어기지를 구축한 것은 당연한 일. 1702년에 그려진 탐라순력도 명월조점(明月操點)을 보면 명월진성이 얼마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는지 알 수 있다. 특이한 것은 진성 북쪽에서 바닷가 사이엔 온통 논이다. 섬의 특성상 논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풍부한 옹포천의 냇물을 가지고 미작지대를 형성 할 수 있었기에 여타지역보다 풍요를 누릴 수 있었다는 것. 명월조점 부기의 내용이 입증한다. 명월진성 창고에 곡식이 3300여 석. 강상종(72) 노인회장이 주장하는 '한림읍의 뿌리가 명월이야!'라는 소리가 허언이 아님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옛 선비들이 시를 읊거나 풍류를 즐기던 명월대(도기념물 제7호).

명월리를 대표하는 이미지는 수령 500년을 자랑하는 60여 그루나 되는 팽나무들이다. 명월천을 따라서 일정한 간격으로 설촌 초기의 조상들이 심어 놓은 나무가 살아있는 마을의 역사자료이기 때문이다. 오명봉(67)개발위원장의 일갈에 무게가 있다. "다른 마을에 500년 된 팽나무가 한 그루만 있어도 보호수로 자랑하기 바쁠 것입니다. 여기는 너무 많아서 관청에서는 중요성을 덜 느끼는 것 같습니다." 예리한 지적이다. 많아서 일어나는 무사안일을 경계해야 한다는 의미와 함께 이 군락지에 가까운 자연자원이자 역사자원을 활용하기 위한 노력이 빈곤하다는 것을 질타하고 있다. 제주시 동부 지역에 비자림과 같은 무게로 서부지역에 명월리 팽나무 군락을 생각한다면 명월리가 지닌 관광자원으로써의 가치는 극명하게 달라졌을 것이다. 소중한 역사문화의 터전에 대하여 여타 농촌마을과 별반 다를 것 없이 대등하게 행정적 접근을 한다는 것은 선택적 집중화를 통한 부가가치 창출로 지역경제에 이익을 취하고자하는 시대정신과도 심각한 괴리를 보이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마을 어르신들의 탄식이 있었다. "저 오백년 세월을 어찌 돈으로 살 수 있단 말인가?" 제주도정 책임자들이 귀가 열려 있다면 하나의 마을 자원이 아니라 제주특별자치도 차원의 특별한 자원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고군봉 이장

명월리는 상동, 중동, 하동 셋이 모여 이뤄진 마을이다. 각 동네마다 마을회장이 있다. 그 마을회장들과 함께 명월리를 이끌어가는 고군봉(48) 이장의 마을 발전 전략은 마을의 역사성만큼이나 무게감이 있었다. "예측되는 부작용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진정한 발전입니다." 부모님 세대로부터 들으면서 자란 이야기가 많아서 그럴 것이다. 하천 정비를 비롯하여 다양한 토목사업의 결과 명월천엔 여름에 아이들이 멱 감을 물이 없어졌다는 것. 그래서 단계별 발전 전략을 짜기 위한 역량강화 프로그램을 마을 주민들이 열성적으로 이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베스트특화마을 사업을 통하여 얻은 경험들을 토대로 역사와 문화가 살아 있는 명월리 만들기에 힘을 모으고 있다. 주민 결속력도 막강하다. 축산분뇨 냄새 저감을 위해 자체적인 방역단을 구성하여 10년 넘게 활동하고 있는 것.

옛 명월초등학교 앞에 고향사람들의 자부심으로 자리한 백난아 기념비.

명월리 청년과 연애결혼 해서 여기서 살아 온지 27년이 되었다는 양영숙(53) 부녀회장이 83세가 되는 30년 뒤, 2045년 명월리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했다. "폐교된 초등학교가 다시 문을 열어 아이들이 뛰놀고 있을 것입니다. 젊은 부부들이 많이 들어와서 살 수 있는 일자리가 풍부하고 저렴한 임대주택들을 마을 사업에서 얻은 이익으로 지을 것이니까요." 명월리의 옛 영광을 다시 찾고 싶은 명월며느리의 당찬 욕심이었다.

제주의 뿌리 깊은 나무 명월리! 그러기에 꽃 좋고 열매가 많이 열릴 것이다. 탐방을 마치고 나오다가 백난아 기념비에서 얻은 영감을 건의 드렸다. '분명 붉은 찔레꽃이 있다는데 마을 여러 곳에 잔뜩 심으면 어떨까.' 하얀 찔레꽃과 차별화해서.

<공공미술가> <인터뷰 음성파일은 ihalla.com에서 청취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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