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미 작가가 촬영한 김수자 해녀. 해녀를 두고 더 이상 비참하다 말하지 마시라. 그들의 인생은 찬란했다.

우도 거주 고성미 글·사진
외국어 같은 제주어 익히며

해녀 '언니'의 이야기 담아

그에게 1980~90년대는 '황금기'였다. 수협 직원이던 남편의 월급이 35만원일 때 그는 물질을 해서 월평균 150만원을 벌었다. "바당에만 다녀오면 돈이 쌓이던" 시기였다.

우도의 김수자 해녀. 그는 지난 날을 풀어내며 '해녀인생 만세'라고 말한다. 오늘날 그가 누리고 있는 경제적인 부유함과 행복은 누굴 해코지하거나 피해를 주고 얻은 게 아니다. "바당에서 숨빌 때는 그저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려야 해"라는 경구 같은 말을 새기면서 혼자 힘으로 일군 결과다.

해녀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끼고 다시 태어나도 해녀가 되고 싶다는 그의 생애가 한권의 책에 담겼다. 김수자 해녀가 구술하고 고성미씨가 글·사진을 더해 엮은 '해녀인생 만세'다.

스스로를 글쟁이, 사진쟁이로 부르는 고성미 작가는 서울 태생으로 4년 전부터 우도에 살고 있다. 고 작가는 처음 김수자 해녀를 봤던 날을 잊지 못한다. 찬바람이 가시지 않은 3월의 봄날, 바다에서 막 빠져나온 김수자 해녀의 입술은 새파랗다 못해 보랏빛으로 변해있었지만 온 몸에서 에너지가 느껴졌다. 좀처럼 입에 붙지 않았던 '언니'라는 말이 김수자 해녀 앞에선 자연스레 나왔다.

고 작가는 그 '언니'를 통해 '헝그리 정신으로 성공신화를 일군' 제주 해녀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제주말은 외국어처럼 낯설었고 물질 용어를 알아듣기 어려웠지만 제주어사전을 옆에 끼고 해녀의 역사를 공부하며 차츰 귀가 열렸다.

'해녀인생 만세'에 펼쳐진 해녀의 삶은 흔히 알려져왔던 비참한 생애와 거리가 있다.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준 바다가 있었고 그 덕에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며 자녀들을 남부럽게 않게 키웠다. 그저 힘들다는 기억 밖에 없을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우도 아카이브' 시리즈 첫 권으로 조만간 '해녀의 노래', '우도의 신당과 돌탑'도 출간된다. 고 작가는 "역랑이 닿을 때까지 우도의 역사와 문화를 글과 사진으로 남기고 싶다"고 했다. 고성미사진연구소.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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