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 기억·신화 이어 4·3담아
감정의 토로보다 스토리 입혀

고향 머물며 계간지 발간 작업

시인은 첫 시집 '달의 영토'에서 제주 유년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두 번째 시집 '해바라기 신화'에선 제주 신화에 눈길을 뒀다. 이번엔 제주4·3이다. 제주의 기억에서 신화로, 제주 역사로 시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박현솔 시인의 세번째 시집 '번개와 벼락의 춤을 보았다'이다.

'마을 사람들은 바다 쪽을 쳐다보지 않는다. 함께 밭일을 하고 그물을 걷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사라진 곳. 빨갱이는 태양을 가리키는 이름일 뿐. 일출봉은 아침마다 붉은 울음을 토해내고 수평선은 참담히 표정을 고친다. 봄마다 붉은 울음이 터져버리는 터진목. 번져오는 슬픔이 뭍을 향해 길을 내고 있다.'('붉은 울음, 터진목'중에서)

성산에서 태어난 시인의 친척 중에도 4·3으로 목숨을 잃은 이가 있었다. 대부분의 제주 사람들이 그랬듯 금기의 시절을 건너온 그의 부모 역시 그런 사연을 드러내길 꺼렸다. 시인은 4·3 시를 쓰는 과정에 조상들의 아픔과 제주도민의 상처를 오래 깊숙이 마주하게 되었다. 좀 더 거리를 두고 4·3을 바라보고 감정의 토로보다는 스토리를 입히려 했다는 그는 "오래된 흉터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 같았고 화해와 치유가 시급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한다.

시인은 이즈음 성산에 머물고 있다. 가끔 오가던 시절에 비해 고향의 풍경과 사람이 더 좋아졌다는 그는 그 기운을 받으며 계간 '문학과 사람'을 만들고 있다. 이 문예지의 주간을 맡아 지난 여름 창간호를 냈고 얼마 전에 가을호를 묶었다. 나희덕·함민복 시인에 이어 겨울호에는 김혜순 시인의 근작과 작품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지면을 준비하고 있다.

시론집 '한국 현대시의 극적 특성'을 발간하는 등 평론 작업도 하는 시인이지만 시는 그에게 행복에 이르는 길을 보여주는 존재다. '정성껏 끓인 한 그릇의 국수를 앞에 두고 몇 가닥은 과거로 또 몇 가닥은 미래로 흘려보내는 순간, 어디선가 밀알 한 톨씩 물고 새떼들이 북반구를 향해 날아가고 있다'는 '우주의 시간' 속 구절처럼 시는 하나의 음식을 통해 실재 너머까지 엿보도록 이끈다.

1999년 한라일보 신춘문예로 문단에 발디딘 그는 "제주 출신 시인이라는 지역적 한계를 일부러 걷어내려 하지 않았던 게 지금의 저를 있게 한 것 같다"며 "저만의 스토리를 가지려 노력하고 이미지의 효과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주요 흐름에서 벗어나지 않게 해주었다"고 덧붙였다. 사색이든 글쓰기든 더욱 깊어지는 일에 집중하려 한다는 시인의 말은 제주에서 문학을 꿈꾸는 이들에게도 유효해 보인다. 문학과사람.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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