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흉터와 무늬
  • 입력 : 2021. 12.31(금) 00:00
  • 이정오 기자 qwer6281@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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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

우리는 매일 새로운 상처를 받는다. 의도와는 무관한 타인의 말 한마디에, 또다시 저질러버린 스스로의 실수에, 내심 기대했던 행운이 도착하지 않는 실망의 순간에 서럽고 한심하며 낙담한 마음으로 무너져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 상처받는 일들에 초연할 수 있을까, 상처받는 순간들을 받아 들이고 극복할 수 있을까. 좀 더 강하고 독한 사람이 되면 또는 무심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면 가능해질까. 타인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나만이 느끼는 감정들로 고민하는 사이 그 상처는 시간이 지나 어느덧 마음에 딱지로 굳어진다. 그러나 몸이 아니라 마음에 새겨진 흉터는 긴 시간이 지나도 이상하게 아문 것 같지가 않다. 통증은 덜해졌지만 여전히 쓰라리고 쳐다보지 않으려 눈을 감아도 선명한 자국으로 어른거린다. 어떤 수단으로도, 어디로 향해도 흉터의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해피 아워', '아사코', '우연과 상상'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일본 영화의 젊은 거장으로 손꼽히며 전 세계 영화 팬들의 뜨거운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인생의 길목에서 애써 눈 감고 지나친 스스로의 상처가 타인의 상처와 마주하는 순간, 그래서 자신과 타인의 상처를 마침내 목도하는 기적과도 같은 교차점을 발견하는 영화다. 2021년 칸영화제 각본상 수상작이자 수많은 시상식과 올해의 영화 리스트에 오르며 내년 아카데미 시상식 국제장편영화상의 유력 후보로 점쳐지고 있는 '드라이브 마이 카'는 장장 러닝타임이 3시간에 달하는 작품으로 영화를 관람하는 것 자체가 삶의 어떤 시간을 통과하는 듯한 느낌을 전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누군가의 삶의 어떤 순간들이 어떻게 시동이 걸리고 주행을 시작하며 언제 멈추는지 그리고 짐작하지 못했던 장애물을 맞닥뜨리는지가 하마구치 류스케의 유려한 드라이빙 테크닉으로 매끄럽게 전개된다. 인생이라는 로드 무비에서 우연과 필연으로 만나게 된 두 사람 가후쿠와 미사키의 동승은 잦은 침묵으로 채워진다. 누구에게나 말 할 수 없는 것들과 말하지 못한 것들이 있기 마련이고 그것이 스스로의 상처일 때는 더더욱 그럴 수 밖에 없다. 연극 연출가인 가후쿠는 사랑했던 아내의 외도와 죽음을 겪었고 미사키 또한 쉽사리 꺼내 놓을 수 없는 고통과 미처 하지 못한 애도를 심장 위에 돌처럼 얹어 놓은 채 살고 있다. 미사키가 가후쿠의 전속 드라이버가 되며 두 사람은 동승하게 되고 두 사람이 각자 꺼내지 못한 것들을 가두고 있는 것들의 껍질이 벗겨질 때 이들의 동행은 방향을 찾는다.

 깊은 상처를 간직한 가후쿠와 미사키 두 사람이 거대한 슬픔을 응시하는 순간들이 영화 속에서 끝나지 않을 고요처럼 흐르는데 마치 긴 겨울을 지나는 것처럼 숨죽여 다른 계절을 기다리는 이 시간은 놀랍게도 투명하고 아름답다. 특히 두 사람이 가후쿠에 연극에 참여하는 유나와 윤수 부부와 함께 보내는 시간들은 차가운 겨울에 만난 오두막의 벽난로처럼 귀하고 따뜻한 정경으로 슬픔의 무게를 덜어내는 조우의 기적을 선사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는 연극이라는 무대와 연기라는 행위를 삶의 한 복판에 포개어 놓고 다양한 언어의 감각과 의미를 교차시키며 소통이라는 말의 의미를 입체적으로 해석해낸다. 긴 응시 끝에 마침내 직시하게 되는 나와 타인의 마음, 바람 소리가 들릴 것처럼 뚫려 있던 그 마음의 구멍이 서로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끝내 전달하는 이 영화는 간곡하고 침착하다. 나의 흉터를 삶의 무늬로 느끼게 되는, 타인의 애도에 진심으로 마음을 더하게 되는 이 영화의 종착지는 우리가 다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전해주는 영화적 좌표이기도 하다.

<진명헌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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