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훈의 한라시론] 조무빈 선생

[김양훈의 한라시론] 조무빈 선생
  • 입력 : 2021. 03.04(목) 00:00
  • 이정오 기자 qwer6281@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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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름 조무빈(趙武彬), 선생의 이름석자를 불러온 것은 올해가 신축항쟁의 두 번째 회갑일 뿐 아니라, 며칠전 삼일절 102주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선생은 항쟁을 이끈 장두 이재수의 누이, 순옥이 전하는 말을 글로 다듬고 보태어 이재수실기(李在守實記) ‘야월의 한라산’를 출간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분이며, 또한 ‘기미년 격문사건’의 주동자이기도 하다.

낯선 땅 오사카에서 순옥은 잊혀져 가는 오빠의 의거를 세상에 널리 알리기 위해 바느질 날품을 팔아가며 애쓰고 있었으나 고립무원이었다. 그러던 차에 누구의 소개를 받고 순옥은 조무빈 선생 댁을 찾았다.

당시의 첫만남을 선생은 이렇게 그렸다. '이때 ㅅㅠㄴ옥녀사((順玉女使)난 손수건으로 이마에 땀을 련(連)해 쓸며 양산을 외인손에 마라죄고 들어왓다.' 선생을 마주한 순옥은 이렇게 하소연을 하는 것이다. "하도 억울하고 울화가 나서 전라남도 도청과 죠선총둑부(朝鮮總督府)에 탄원서까지 제출하여 보왓슴니다. 이 무식한 여자의 소견으로난 될수록 리이사(李義士)의 실긔(實記)를 우리 조선 국문으로 쓰엇스면 조흘 줄로 생각합니다." 이후 선생은 순옥의 이야기를 골간으로 이재수실기 쓰기에 혼신을 다한다.

순옥은 예닐곱 나이에 창의군을 지휘하는 오빠를 따라 밥을 짓고 허드렛일을 하며 싸움터를 몸소 겪었다. 조무빈 선생은 당시 열다섯 나이였으니, 제주성으로 나아가는 이재수 장두의 서군(西軍) 깃발과 함성을 눈귀로 보고 들었으리라. 두 사람이 힘을 합쳐 출간한 이재수실기를 뭇 학자들은 사료적 가치가 있네 없네 한다. 선생은 이러한 트집을 미리 알아채기라도 한 듯 “리제수는 제주 사람이다. 또 그 군사행동도 제쥬에만 국한된 사실인대 전죠선에 무슨 그러케 큰 관계가 잇스리요. 이러케 생각하는 이가 잇다하면 그는 반다시 오해임이다.”라고 했다.

조무빈 선생은 1886년 한경면 낙천리에서 태어났다. 나라의 운명이 백척간두에 서 있던 때였다. 개화파의 갑신정변, 동학혁명의 불길, 친일개화파의 갑오개혁이 줄줄이 좌절되고 아관파천이 이어졌다. 대한제국 선포는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 조선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지만, 속절없이 침몰하고 말았다.

1919년 기미년 만세운동이 일어난 그해, 서른셋 장년이 된 선생은 서당훈장을 하고 있었다. 선생은 도내 다른 훈장 세 명과 도민 총궐기를 촉구하는 격문을 붙이다 일제 경찰에 검거돼 처벌을 받았다. 이른바 ‘기미년 격문사건’이다.

이 사건은 한일합방을 기념한다며 조선총독부가 내리는 은사금과 기로금을 받고 입을 다물었던 제주 유림의 지도자와 관료들에 대한 항의이기도 했다. 일제는 당시 제주 여든 한 명의 유생과 효자절부들에게 금전을 뿌려 항일의 의지를 꺾으려 했다. 선생이 실기에서 불량 천주교도들에 대한 언급인 “세력에 붓좃치난(붙좇는) 향촌 불량 파락호 잡류배”는 당시 강대한 외국세력에 빌붙어 나라를 팔아먹는 파렴치한들에 대한 선생의 비난이기도 했다.

‘야월의 한라산’은 오빠 이재수의 의거를 글로 남기려 했으나 좌절된 순옥의 절망에 조무빈 선생이 응답한 결과물이었다. 관노 출신의 신분으로 외세를 업은 천주교도들의 불의에 좌고우면하던 양반계급의 지도자들을 뒤로하고 민군(民軍)을 지휘했던 이재수를 선생은 인정한 것이다. 훈장 출신의 유생으로서 개화의 마음을 가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김양훈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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