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새하얀 침묵
  • 입력 : 2021. 01.15(금) 00:00
  •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영화 '고스트 스토리'.

데이빗 로워리 감독의 2017년 작품 '고스트 스토리'는 제목처럼 '유령의 이야기'다. 이 영화는 세상을 떠난 한 남자가 마치 지박령이 되는 것처럼 자신이 살던 공간을 떠나지 못하고 떠돌며, 그와 함께 했던 사람이 남긴 마지막 문장을 찾기 위해 긴 시간을 머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애틋하다'라는 단어가 품은 마음의 뜨겁고 고단함을 영상으로 옮긴 듯 아름답고 슬픈 영화다.

 '고스트 스토리'는 대사가 거의 없는 작품이다. 대화가 멈추고 침묵에서 작은 소리가 깨어나고 소리가 사라진 자리엔 음악이 나타나고 음악이 사라져 침묵이 되는 공간에 다시 흐느낌이 생기는, 섬세하고 찬찬한 흐름의 영화다. 삶을 떠난 이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 작품은 신선하고 기묘한 비쥬얼의 판타지 영화인 동시에 감상 내내 사색과 명상을 선사하는 독특한 질감의 아트 필름 이기도 하다. 주연을 맡은 루니 마라와 케이시 에플렉은 각각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과 아카데미 영화제 남우 주연상을 수상한 걸출한 배우들이지만 사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두 개의 검은 눈을 가진 새하얀 침대 시트다. 거의 모든 이들의 죽음을 덮은 촉감인 동시에 죽음 이후의 움직임을 가능케 하는 이 익숙한 재질은 만질 수 없는 삶의 공간들을 유영하는 유령의 코스튬이자 이 작품을 떠올리게 만드는 시그니처 이미지 이기도 하다. '고스트 스토리'속 새하얀 침대 시트가 천천히 움직이고 멈추고 기억하고 분노하고 침잠 하다가 창문 건너 편에 서서 자신에게 인사를 전하는 또 다른 침대 시트를 만날 때, 우리는 새하얀 침대 시트 위로 내린 죽음이라는 선언이 결코 다시는 움직일 수 없는 멈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단정한 문장 안에 폭발적인 감정을 숨겨 놓은 백수린 작가의 단편 '고요한 사건'의 마지막 두 페이지는 굉장히 시각적이어서 이 소설을 떠 올릴 때마다 마치 그 마지막 문단의 앞에 서서 주인공과 함께 풍경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곤 한다. 그 마지막 문단은 어느 작은 마을, 차가운 겨울의 새벽 위로 내리는 흰 눈의 모습과 소리를 옮겨 담고 있는데 이 소설의 안에 들끓던 여물지 않은 상처들 위를 덮어버린 느닷없는 눈의 방문은 아름다운 동시에 섬찟하기도 하다. '고요한 사건'은 재개발 지역에 터를 잡고 살게 된 열 여섯 살의 주인공이 만나게 되는 계층적 관계와 그 관계에서 발생되는 마음의 진동, 거기에서 비롯된 파열음의 날카로움과 주저함의 순간들을 섬세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이야기의 마지막, 어떤 가슴 아픈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주인공이 머뭇거리며 용기를 내고 또 접는 두려움의 순간에 그 감정의 어긋나는 찰나를 일순간 사라지게 만드는 백야의 무심한 아름다움은 기이하게 아름답고 슬프다.

 올 겨울은 눈이 유독 인상적으로 내린다. 지난 해와 다르게 녹지 않고 쌓인 눈들이 새하얀 연초의 풍경을 만들어 내고 있다. 눈이 오는 날이면 SNS에는 전국 각지의 눈 사진과 동영상들이 새하얗게 피드를 수놓는다. 앙상한 나무 위에 풍성한 크림처럼 내려 앉은 눈, 아이디어가 넘쳐나는 눈사람의 재미있는 형상들 그리고 그 눈사람을 때리고 없애버리는 누군가의 손쉬운 폭력과 그것을 경계하는 이들의 공포로 가득한 걱정들, 배달이 직업인 이들의 고통스러운 항변 그리고 눈 덮인 도시 위에 나타나지도 숨지도 못한 길 동물들의 안타까운 사연들까지 하얀 눈의 등장은 세상의 많은 부분들을 숨기거나 꺼내어 놓는다.

 눈부시게 하얗고 아름다운 눈은 사람의 온도에 닿아 녹는 순간 금새 그 색을 잃어버린다. 새하얀 순간이 지속되는 것은 차갑게 얼어버리는 온도와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고립이 가능할 때 뿐이다. 또는 정성을 담아 눈을 사람으로 만드는 어떤 달콤하고 상냥한 마음일 때에 가능하다. 늘 생경한 기분이 들게 하는 '눈사람'이라는 말에 담긴 인간적인 온기는 인간 답거나 답지 않게 다정하다. 이 겨울, 눈으로 생겨나는 어두운 사연들이 유독 더욱 마음을 후벼 파는 것은 어쩌면 눈이 내린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기 위해서는 아직 우리가 할 일이 너무 많아서 일 것이다. 천진한 아이들이 내리고 쌓이는 눈의 추억을 응당 곱게 간직하기 위해선 침묵해 온 어떤 일들 앞에서 어른의 목소리를 내야하지 않을까. 눈으로 만들어진 사람을 때려 부수는 아무렇지 않은 폭력 앞에서도 남의 일이라며 침묵하고 있다면 그것은 결국 아이들과 함께 살아갈 세상의 명도를 더욱 어둡고 탁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소리 없는 동의가 아닐까.

<진명현·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4545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