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안녕이라 말 못하는 제주 사월 숲속

아직은 안녕이라 말 못하는 제주 사월 숲속
홍경희 시인 두 번째 시집 '봄날이 어랑어랑 오기는 하나요'
나지막한 슬픔이 되는 이름들… 4·3으로, 베트남으로 확장
  • 입력 : 2021. 01.04(월) 19:04
  • 진선희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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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진 자리에서 속울음으로 당신의 이름을 부르는 여자가 있다. 귀인은 아직 오지 않았고, 희망을 말하기엔 이르다. 제주 홍경희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봄날이 어랑어랑 오기는 하나요'(걷는사람 출판사)에 그려진 풍경이다.

2003년 '제주작가' 신인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왔고 2010년에 첫 시집 '그리움의 원근법'을 낸 홍경희 시인과는 제주작가회의 사무국장으로 만난 날이 더 많았다. 단체 살림을 꾸리고 홍보를 맡다보니 그 직책이 더 친숙했다. 하지만 그는 시를 놓지 않고 있었다. 근래에도 성산읍의 어느 마을로 달려가 담벼락에 벽시를 남겼던 그다. "문장들은 덜그럭거리고, 어긋난 행간은 쉬 바로잡히지 않습니다"고 했지만 10년 동안 다듬고 다듬어낸 시편들은 울림을 준다.

'둥글거나 모나거나 차별없이 쓸모있게// 어깨를 빌려주고 숨구멍 나눈// 토정 혈통 섬것들,// 뼈와 지문들'('제주 밭담' 전문)이 시집의 기조가 아닐까 한다. 시인은 '섬것들'이 만들어온, '섬이, 섬사람들이 서로를 신으로 모시고 살았던 그때 그때처럼'('섬사람 이야기') 이 땅에 밀려든 파고를 헤쳐온 이들에 눈길을 둔다.

그 출발지는 '귀덕'이다. 그것은 '가만히 떠올리기만 해도/ 나지막한 슬픔이 되는 이름'이고 '견딜 수 없는 반성'이 된다. 몸이 조금 불편해도 정신은 맑아 갈수록 품이 넓어지는 '귀덕'의 골목길 팽나무를 닮은 듯, 마을을 떠난 시인의 시선은 제주가 겪은 전대미문의 참사로, 베트남의 학살 현장으로 확장되어 간다.

'이 봄에는 다녀갈까'란 장으로 묶인 시들에 그런 사연이 있다. '아무도 안녕이라/ 말 못하는 사월 숲속'('사월에 내리는 눈')에서 시인은 '가슴에 숟가락 하나 꽂고 간 그 사람'을 떠올린다. '산전, 꽃 진 자리'에선 '저 숲길로 떠나간 넋들'을 달랜다. '꽃의 내력'엔 '스물다섯 고운 나이'를 관통한 총탄이 있었다. 시인은 '어린 때죽나무를 위한 조사'를 쓴다. '숲길을 걷는 이여/ 함부로 발자국 내딛지 마라// 아직도 떠나보내지 못한 계절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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