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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있는 풍경 문학 도시를 가다] (8)부천 창의도시 프로젝트
만화·영화·음악으로 키워온 도시에 문학의 창조력 더하라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입력 : 2020. 10.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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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업도시 한계 극복하기 위해
90년대 후반부터 문화도시정책
시민들 문화적 욕구·열망 반영
분야별 시설·인력 등 지속 투자
네트워크 도시 작가들 레지던시
디아스포라 국제문학상도 첫발

서양화가이자 문학가로 진보적 여권론을 펼치며 인형(노라)이기를 거부했던 나혜석(1896~1948). 그가 1921년 발표한 시 '인형의 가(家)', 1934년 수필 '이혼고백서'에 실렸던 목소리들이 그곳에 부활하고 있었다. 어떤 장르보다 시대를 예민하게 읽는 문학을 통해 가부장적 사회제도가 만든 남성중심에 대한 도전으로 새로운 여성상을 제시하려 했던 그의 외침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리라.

지난 7월 29일 경기도 부천시 한국만화박물관 기획전시실. '노라를 놓아라-부수는 여성들'이란 제목으로 만화전이 한창이었다. 코르셋을 찢는 여성들, 제도 밖으로 탈주하는 여성들,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들로 나뉘어 전시된 작품들은 나혜석 시절과 지금이 얼마나 다를까를 반문하도록 했다. 문학을 넘어 누구에게든 차별과 억압은 더 이상 없어야 된다는 점을 우리에게 친근하고 대중적인 만화 언어로 풀어냈을 뿐이었다.

편안한 쉼터이면서 카페같은 공간으로 리모델링한 원미도서관. 사진=진선희기자

동아시아 최초의 '유네스코 문학 창의도시'로 가입하기 전 부천엔 만화가 앞서 꽃을 피웠다. '판타스틱'한 영화 축제가 걸음을 떼어놓았고 부천의 이름을 앞에 단 오케스트라는 도시의 격을 높이는 선율을 빚어냈다.

부천시 문학 창의도시를 중심으로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 추진전략 연구'(2017) 주제 석사논문을 썼던 유성준 부천시 문화산업전략과장은 "부천이 공업도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추진한 것이 만화, 영화, 애니메이션, 음악 등 문화도시정책"이라며 "부천은 1990년대 후반부터 20여 년간 꾸준히 문화정책을 펴서 공업도시의 고정된 이미지를 탈피하는 데 성공했다"고 밝혔다.

부천은 서울과 인천 등 대도시에 근접해 배드타운처럼 잠시 머물다 떠나는 도시라는 이미지가 있었으나 시민들의 문화적 욕구와 열정을 문화활동과 인프라 구축으로 품어왔다. 기초 지자체 중에서 처음 문화재단이 설립됐고 유명 지휘자들이 거쳐간 부천필하모닉오케스트라를 키웠다. 한국만화영상진흥원, 만화박물관, 만화창작스튜디오 등이 있고 전국 만화 작가의 3분의 1 이상이 부천에 둥지를 틀었다. 부천국제애니메이션 페스티벌, 부천국제판타스틱 영화제 등도 열어왔다. 도서관에 대한 투자는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부천은 불과 50년 사이에 전원도시에서 공업도시, 공업도시에서 문화도시로 역동적으로 성장해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연장선에 놓인 창의도시는 문학을 중심에 두고 지난 시간 부천이 쌓아온 문화적 역량으로 시민의 삶을 창조적으로 변화시키자는 열망이 담겼다.

부천중앙공원에 설치된 수주 변영로 '논개' 시비와 목일신 '자전거' 동요비.

창의도시는 왕관을 쓰거나 금메달을 따오는 일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성공, 상처와 고민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부천에서 다른 문학 창의도시들과 연대하고 교류하며 삶의 질을 높이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이루기 위한 모델을 가꾸어가자는 의미가 있다. 2017년 여름 부천이 유네스코 창의도시 네트워크에 제출한 신청서에 내세웠던 표어도 '삶을 바꾸는 문학의 힘'이었다.

부천시가 실시한 2019년 중장기발전계획 용역에서는 이를 위한 전략으로 문학을 통한 세계시민교육, 만화·애니메이션·영화·음악 분야 등에서 활동해온 창의적 인재들의 융복합 프로젝트, 미래도서관 선도, 디아스포라 국제문학상 제정 등이 제시됐다. 구체화된 방향 설정, 전문 조직과 인력 등이 뒷받침되어야 하겠으나 부천시는 일부 과제를 실천에 옮기고 있다.

'원미동 사람들의 거리'에 놓인 소설 속 김반장 조형물.

지난 2월 제정된 디아스포라 국제문학상은 그중 하나다. 부천디아스포라문학상(BUDILIA, Bucheon Diaspora Literary Award)은 이주민들이 모여사는 도시 풍경을 그려낸 양귀자의 연작 소설집 '원미동 사람들'의 배경이 된 곳이면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대지'의 작가 펄 벅이 한국전쟁 영향으로 생겨난 전쟁 고아 등 약 1500명의 아동을 수용한 소사희망원을 세웠던 부천의 상징성을 반영해 만들어졌다.

지금의 디아스포라는 여러 민족과 집단이 국가와 민족과 지방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는 이들로 그 뜻이 확장됐다. 문학을 통해 세계의 연대와 환대, 협력의 정신을 고양하기 위한 부천의 첫 국제문학상으로 한국어나 영어로 출판된 현존하는 작가의 디아스포라 주제 장편소설이 심사대상이다. 매년 1개 작품을 수상작으로 선정할 예정으로 10월 30일까지 후보작 추천을 받고 있다. 수상작 발표는 내년 7월로 계획되어 있다.

한국만화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한국만화박물관 내부.

국제 레지던시는 시범운영 사업으로 첫발을 뗐다. 해외 창의도시 네트워크 회원도시에서 75명이 지원했고 지난 5월 캐나다 몬트리올 디자인 창의도시에 사는 한국계 소설가 제프 노, 영국 노팅엄 문학창의도시에 거주하는 시인 로리 워터맨을 참여 작가로 뽑았다. 제프 노는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삶을 사는 누군가의 문화적 기억의 복잡성을 소설로 형상화해왔다. 로리 워터맨은 국경으로 인해 분리되었지만 공통점을 더 많이 지닌 채 대립하는 사람들을 시로 다룬다. 코로나19 여파로 국내 입국이 여의치 않아 사업이 계속 미뤄지다 10월부터 운영에 나서고 있다.

한국만화박물관에서 '노라를 놓아라-부수는 여성들' 기획전이 열리고 있다.

양귀자 작가는 인물소설로 소개된 '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1993)에 '원미동, 그 이후'를 실었다. 원미동을 떠난 시기에 쓴 소설에서 작가는 "서울로 이사와서 한동안은 대화마다 "원미동에서는," 이라고 서두를 붙이는 것이 버릇처럼 되어 있었다"고 적었다. 원미동에 살 때보다 더 원미동에 집착하고 있는 듯 보인다는 작가는 어린 딸의 일기장에서 "누군가 나를 내 고향 원미동으로 데려다 주었으면."이란 구절을 읽고 나이 든 어머니와 함께 훌쩍훌쩍 울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덧붙인다. "떠나버린 사랑이지만, 그래도 나의 옛사랑은 여전히 힘이 세다. 힘이 세서 지금도 나를 구속한다." 독자들도 그렇다. 문학이 낯선 곳 원미동으로, 부천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고 있다. 문학은 힘이 세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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