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훈의 한라시론] 답단이내는 왜 바다를 만나지 못했나?

[김양훈의 한라시론] 답단이내는 왜 바다를 만나지 못했나?
  • 입력 : 2020. 09.10(목) 00:00
  •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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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내포구에서 출발하는 제주올레 16코스는 '철무지개'로 불리던 구엄포구에서 한라산을 향해 직각 90도 길을 꺾으면서 마을 변두리인 모감동을 향한다. 모감동은 60년 전 수산저수지 건설로 제 터를 빼앗긴 하동마을 주민들이 이주한 동네다. 조금 더 걸어가면 수산봉이 눈앞이고, 동쪽 기슭 아래 수산저수지가 있다. 논농사가 드문 섬나라에, 더구나 논밭평야가 펼쳐진 곳도 아닌 이곳에 웬 저수지인가 하고 고개가 갸웃거려질 만한 풍경이다. 천연기념물 제441호인 수산곰솔이 굽어보는 수면 아래에는 우리가 모르는 작은 흑역사가 잠겨있는 건 아닐까? 촉이 예민한 여행자라면 마을 노인에게 저수지의 탄생 비화를 물어볼 마음이 생길 것이다.

수산저수지 건설은 이 지역 출신 국회의원이 쌀농사를 짓겠다며 1957년 이승만 정부에 건의해 물꼬를 텄다. 해마다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당시, 식량 증산을 독려하던 중앙정부였으니 옳다구나 하고 허가가 떨어졌다. 후일 저수지 건설건의는 즉흥적 단견이란 것이 증명됐으나, 어리석음은 지혜로움보다 끈덕진 법이다. 답단이내를 막아 저수지 둑을 쌓는 공사가 곧 시작됐다. 노꼬메오름에서 수산리를 거쳐 구엄리 삼밭알 내깍으로 흘러내린 끝에 바닷물과 합류하며 아름다운 여행을 마치던 답단이내는, 이렇게 저수지 제방에 막혀 '답답이내'가 되는 운명을 맞아야 했다.

저수지 공사로 오름가름과 벵디가름은 물 아래로 사라지고, 이 마을 70여 세대는 정든 고장을 떠나야 했다. 500년이 넘은 조상들의 터전을 한사코 떠나지 않으려 했으나, 논농사를 지어 곤쌀을 먹자는 관청의 지시와 그럴싸한 여론에 밀려 하동마을 사람들은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이들은 각각의 사정에 따라 제주시와 번대동으로 옮겨가고, 일부 세대는 모감동으로 뿔뿔이 헤어졌다.

건설회사가 동원한 지엠시 덤프트럭들이 저수지 공사장으로 석재와 흙덩어리를 쉴 새 없이 실어 날랐고, 솜씨 좋은 석공과 인부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을 먹이는 함바집도 여럿 생겨났다. 수산리와 인근 사람들도 공사판에서 일당을 벌었다. 궁핍한 시절이라 현찰 만지는 재미가 쏠쏠했다. 한층 한층 올라가는 저수지 제방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쌀농사의 꿈을 꾸었다. 환상은 얼마 없어 안개처럼 사라졌지만, 한바탕 축제라면 축제였다.

1959년 3월 시작된 공사는 1960년 12월 마침내 완공하였다. 그러나 강력한 쌀농업 진흥책을 추진했던 이승만 정권이 4·19의거로 무너지면서 애초부터 예측이 잘못된 저수지는 쌀농사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채 방치됐고, 수질과 녹조 때문에 밭농사 용수로도 이용하지 못했다. 녹조가 낀 물로 스프링클러를 돌리면 이끼가 미세한 헤드 구멍을 막아버려 부품을 계속 교체해야 한다. 그래서 농민들은 아무리 가물어도 수산저수지 물을 이용하지 않는다. 한국농어촌공사가 수억 원을 들여가며 수질개선 노력을 해보지만, 효과는 미미한 실정이다.

1980년대 말 레저회사가 수산저수지를 위락 시설과 유료 낚시터로 개발해 낚시꾼과 관광객을 유치할 계획을 세웠다. 회사는 보트장과 야외 풀장 그리고 식당을 지어 한동안 운영했지만, 현재 그 시설들은 흉물이 된 채 지금껏 방치돼 있다. 제주가 세계 유일 국제 4대 보호지역이라는 자랑 뒤편에 수산저수지와 같은 어리석음이 오늘에 더는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김양훈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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