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춘옥의 하루를 시작하며] 어머니의 4·3트라우마

[고춘옥의 하루를 시작하며] 어머니의 4·3트라우마
  • 입력 : 2020. 08.12(수) 00:00
  • 강민성 기자 kms6510@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며칠 전, 4·3트라우마센터를 방문했다. 개소한 지 두 달을 넘어서는 센터에 들어서는 어르신들의 표정은 매우 밝아 보였다. 아직은 신체적, 정신적 치유를 위해 갖춰져야 할 장비와 전문 인력이 비좁은 공간과 더불어 많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몸과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치유의 수준을 넘어 흡사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4·3 당시 25세의 나이로 남편을 잃고, 그 와중에 갓난 아들 둘까지 떠나보내야 했던 어머니께서 살아계셨더라면 이곳에서 한 많은 세상 한 시름 달랠 수도 있었을텐데 못내 아쉬웠다.

실로 팍팍한 시절 "쇠테우리 말테우리 허멍 살았주. 쇠로 못 태어낭 여자로 태어나는 거라"던 어머니의 눈물조차 메말라버린 휑한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려왔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일 년 전부터 중풍 환자처럼 손을 떨기도 했고 (의사는 심리문제라 했다) 자꾸 헛소리를 하시기 시작했다. 과거의 세상 속으로, 그것도 당신의 가장 참혹했던 그 시간으로 들어가신 거였다. 그런 날에는 대개 새벽 네시쯤 내가 달콤한 잠 속에 빠져 있을 때, 어느새 머리맡에 다가와 흔들어 깨우면서 "얘야, 얘야, 어서 일어낭 빨리 아방 벽장에 곱지라. 아이고, 막 총소리 남쩌게" 하시면서 몹시 고통스럽게 머리를 쥐어뜯곤 하셨다. 심지어 어느 날은 집에 사람이 없는 낮 시간에 어머니가 이불을 짊어지고 산으로 피난 간다고 달음박질하는 것을 본 동네삼춘이 겨우 말려 집으로 모신 적도 여러 번이다. 4·3트라우마는 한두 번쯤 왔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고요히 숨죽인 채 웅크리고 있다가 심신이 불안정할 때마다 불쑥 튀어나와 휘젓고 다니면서 주변을 온통 들쑤셔 놓는 '형체 없는 괴물'이었다. 본인이나 주변사람들이나 한 마디로 '사는 게 지옥'인 것이다. 치매가 차라리 '망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만 트라우마는 이런 식이었다.

어느덧 어머니의 나이가 되어 가는 필자에게도 트라우마는 유전됐는지 4·3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할 때마다 아프고 두려워 펜을 내려놓기 일쑤다. 필자 역시 4·3트라우마 치유 대상이 됐나 보다. 아마도 제주인 모두가 그럴 것이었다. 누구는 살아남기 위해 비빌 언덕을 붙들고, 누구는 가족에게 조차 등 돌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동전의 양면처럼 다른, 한 고통일 수도 있는 거였다. 70년이 훌쩍 지난 오늘도 빨치산 가족이었다는, 경찰 가족이었다는 편견 혹은 트라우마가 평화로 가는 발목을 잡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서글프다.

전문의는 "트라우마의 극복이란 이해당사자 쌍방 간의 소통과 화해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치유"라 말한다. 장차 4·3트라우마센터가 끌어안고 나가야할 험난한 여정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10여 년 전, 필자는 운 좋게도 태평양전쟁 50주년 기념으로 세운 오키나와의 '평화의 초석' 설계자이신 다나키 선생님을 만나 뵌 적이 있다. 내오, 네오 편 가르지 않고 미국인 일본인 등 전쟁 때 사망한 23만 8000여 명의 명단을 전부 새겨 넣어 진정 인류의 '평화의 초석'을 마련한 장본인, 그 분의 탄탄한 의식이 내 안에 생생하다. <고춘옥 시인>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9557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