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건의 문화광장] 성찰의 도시, 대정성의 옛길을 걷다

[양건의 문화광장] 성찰의 도시, 대정성의 옛길을 걷다
  • 입력 : 2020. 07.07(화) 00:00
  • 강민성 기자 kms6510@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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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이후 사회적 거리두기 생활수칙은 걷기 열풍을 더욱 가속화한다. 이미 '제주 올레'를 통해 제주 사회에 전파된 트래킹의 여가문화는 이제 '걷는다는 것'의 철학적 의미까지 더해 자신의 존재를 찾는 성찰의 수단이 된 듯하다. 그래서 요즘 주변을 돌아보면 '○○길'의 이름을 붙인 각양각색의 길이 즐비하고 오히려 길 공해의 수준이다. 더구나 막상 그러한 길을 걸어보면 관리적인 측면에서 심각한 상황을 직면하게 된다. 누군가의 열정과 노력에 의해 길이 개척되고 만들어져 있지만, 지속가능한 관리체계는 허물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급성으로 비춰볼 때, 2017년 '제주특별자치도 옛길의 조성 및 운영 등에 관한 조례'의 제정은 시의적절했다. 제정 당시 관리운영주체의 위탁 문제로 잡음이 있기도 했으나 옛길의 조성 및 관리를 위한 통합적 종합계획을 수립하는 근거로써 유의미하다.

최근, 옛길 종합계획 수립을 위한 연구진과 조선시대 삼현 중 하나인 대정성을 답사할 기회가 있었다. 일행은 1914년도에 제작된 지적원도에 의지해 동문 입구 추사 적거지에서 서문까지의 옛길을 조사했는데, 아직까지도 그 원형성이 유지되고 있는 것이 놀라웠다. 탐라순력도에 표현된 객사터와 관청의 자리가 여전하고, 옛길을 밟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기와의 파편 소리는 우리를 200여 년 전으로 안내한다. 그런데 이 자리가 기와를 굽는 가마터였다는 자원봉사자의 황당한 설명에 상상의 끈이 끊겨버린다. 대정성의 발굴조사가 조속히 시행돼 제대로 된 대정성의 공간 구조가 밝혀져야, 향토사학자의 스토리텔링이 정사가 되는 일이 없겠다는 노파심이 있다. 조선시대 성 안 도로의 구조는 일반적으로 T자형인데 동서도로의 하부 서측은 현재 보성초등학교 자리이고, 동측은 민가들이 모여 있다. 성 안 주민의 생명수인 우물터와 자연스레 연결되는 옛길에서 선인들의 일상을 그려본다. 더불어 보성초등학교와 성 안 곳곳에 흩어져 있는 과거 대정성의 유적들에서 결국 허물어져버리는 도시와 건축의 유한함을 상기하게 된다.

또한 대정성에 오면 슬픈 사연으로 추사관을 돌아본다. 추사 김정희의 제주유배를 기념할 공간 하나 마련하지 못한 상황을 안타까워하던 차에, 1984년 제주문화예술계는 추사 적거지 사업을 추진하기로 뜻을 모았다. 당시 예총 지회장이던 고 양창보 화백(1937-2007)은 전국의 예술가들에게 그림기부를 받아 건립기금을 조성한다. 제주 사람들의 자발적 의지에 의해 추진된 추사 적거지는 그 이후 제주민의 마음과 정신이 추사 김정희와 연결되는 상징적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10여 년 전, 문화재청은 추사 적거지에서 제주민의 흔적을 허물고 중앙의 관점으로 그 위에 지금의 추사관을 세우고 만다. 이제는 연농 홍종시 선생과 청탄 김광추 선생의 글씨가 새겨진 추사 기념비만이 유일하게 적거지 뒷마당에서 제주민의 정신을 기억하고 있다.

옛길을 걷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옛길에는 자연풍광과 더불어 역사적 서사가 쌓여있어, 길을 걷는 개인마다 자신만의 시공차원 안에서 발바닥의 촉각으로 전해오는 성찰의 체험을 얻는 것이다. 반나절의 짧은 대정성 옛길의 걷기로도 실존적 주체로서의 자신을 발견 하게 되듯이…. <양건 건축학박사·제주 공공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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