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정찬일 시집 '연애의 뒤편'

[이 책] 정찬일 시집 '연애의 뒤편'
동굴 속 아이들 남긴 시린 발자국 밟다
  • 입력 : 2020. 04.24(금)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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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취우'로 제주4·3평화문학상을 수상했던 정찬일 시인이 4·3을 그린 시 등을 담은 세 번째 시집을 냈다.

4·3평화문학상 '취우' 등
제주 4월 노래한 시편 다수

자연에 상처 어루만지는 힘

그는 1998년 '현대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문단에 나왔다. 2002년엔 제2회 평사리문학대상 소설 부문을 수상했고 2005년에는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소설로 등단했다. 정찬일 시인이다.

2018년 제6회 제주4·3평화문학상 시 부문 수상자로 선정되었을 때는 그가 한 편의 작품을 건져 올리기 위해 오늘도 무수히 담금질을 하고 있다는 걸 또 한번 보여줬다. 수상작은 4·3으로 잃어버린 마을인 삼밧구석이 등장하는 '취우(翠雨)'였다. "주먹을 쥔 결기와 투쟁적 언어로는 어제와 오늘, 내일을 열고나갈 시대를 어루만질 수 없다. 서정의 힘이 다시금 필요할 때다. '취우'가 그러한 시적 성취와 함께 치유의 덕목을 고루 갖추었다"며 심사위원들은 그것을 당선작으로 냈다.

그의 4·3 시는 이제 한창 궤도에 오른 듯 하다. 보통의 시 창작집보다 두툼하게 묶인 그의 세 번째 시집 '연애의 뒤편'에 묵직하게 자리잡고 있는 시들이 4월 그날을 노래하고 있다.

큰넓궤, 도엣궤, 폭낭, 무등이왓 등 그의 시 제목에 등장하는 장소나 자연물은 제주 사람들에겐 4·3이 곧바로 연상되는 존재들이다. 특히 제주방언으로 굴을 뜻하는 '궤'는 선사시대의 유적지 같은 곳이지만 4·3 당시 피난처였다. 제주 사람들은 문명의 시대에 닥친 야만의 시절을 그곳에서 견뎠다.

1948년 11월 15일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이 시행된 이후 서귀포시 안덕면 동광리 무등이왓과 삼밧구석 사람 120여 명이 약 50일 동안 숨어살았던 용암동굴 도엣궤. 시인은 '도엣궤'에서 '동굴 안을 들여다보는 내 눈길을 누군가 자꾸만 밀어낸다/ 아직 나눌 얘기 남아 있는데 벌써 저물 무렵이다/ 아이들이 흘리고 간 시린 발자국 또박또박 밟아 가며/ 서늘하게 젖은 내 이마에 돋는 별 몇 점'이라며 무자년 아픔에 손을 내민다.

깊디깊은 상처를 다독이는 힘을 시인은 자연에서 찾는다. 표제작에서 '제 그림자를 오래 들여다볼 때 뿌리 깊은 밤은 열린다'는 대목에 이르면 생의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닿아있다고 보는 나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시인의 모습이 떠올려진다. 문학수첩. 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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