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 작가의 詩(시)로 읽는 4·3] (56)오래된 숯가마-홍성운

[김관후 작가의 詩(시)로 읽는 4·3] (56)오래된 숯가마-홍성운
  • 입력 : 2020. 04.23(목)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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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나무 한 단쯤은 등짐 지고 넘었을 거다

관음사 산길을 따라 몇 리를 가다보면

숲 그늘 아늑한 곳에 부려놓은 숯가마 하나



못 다한 이야기가 여태 남았는지

말문을 열어둔 채 가을하늘을 바라본다

숯쟁이 거무데데한 얼굴 얼핏 설핏 떠오른다



큰오색딱따구리 둥지 치는 소리야

적막강산 이 산중을 외려 위무하지만

무자년 터진 소문에

발길 모두 끊겼느니



시월상달 한라산 단풍은 그때 화기로 타는 거다

누군가를 뜨겁게 했던 내 기억은 아득하여도

한 시절 사리 머금은

그 잉걸불 오늘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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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침식 작용으로 인해 그 원형이 많이 훼손됐겠지만 숲 그늘은 그 상흔을 보듬어준다. 섬 사내의 거무데데한 얼굴은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을진대, 시월상달 한라산의 단풍은 무자년의 화기가 남아 아직도 잉걸불로 타고 있다. 그 단풍을 보면서 시적 화자는 "누군가를 뜨겁게 했던" 기억으로 그의 얼굴에 홍조가 일고 있음을 어렵잖게 읽어낼 수 있다.

결국 이 작품은 선경후정(先景後情)의 바탕에 4·3이라는 서사가 가미되어 탄생했으며, 크게 외치지는 않지만 서경·서정·서사가 세 축을 이루는 시인의 시세계에 근접했다고 말할 수 있다. "섬에 산다는 건 절반은 기다림"이라는 고백에 싱숭생숭 꽃이 핀다. "가슴에 외등을 단 섬 사내의 고집"처럼 특유의 바람과 설렘으로 난만한 제주. 시인은 그런 곳곳의 꽃과 풀과 나무의 사생활을 캐며 섬의 일생을 필사하는 중이다. 올레, 한담, 부록마을 같은 제주살이의 안팎도 살뜰히 옮겨 적고 있다. 그가 읽는 섬그늘은 깊고 푸르고 정겹고 따뜻하다. '무자년'의 숯가마도 그렇게 제주만의 역사를 다시 쓰는 숯가마로 거듭나고 있다. 오래된 등대 '도대불'과 돌아서면 솟아나는 '몰래물'로 삶의 목을 축이며 가는 시인의 웃음 실린 눈초리에 오늘도 제주가 다습게 실린다.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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