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 작가의 詩(시)로 읽는 4·3] (54)터진목-장영춘

[김관후 작가의 詩(시)로 읽는 4·3] (54)터진목-장영춘
  • 입력 : 2020. 04.09(목)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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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뜬 어느 사내

회오리바람 몰고 온

닿을 듯 닿지 못한 젖은 손을 내밀며

터진목 붉은 발자국 모래알을 날린다



만선의 꿈을 한번

이룬 적 있었는가



겨우내 모래톱에 새겨 넣은 불립문자

오늘은 누구의 죄를 단죄하려 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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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진목은 성산 앞바다 광치기 해변을 말한다. 산리는 본섬에 딸린 작은 섬이었다. 고립된 것은 아니고 썰물 때 드러나는 모래톱이 본섬을 이어줬다. 이 '터진 길목(터진목)'을 따라 사람들이 왕래했다. 성산리는 4·3사건 발발 초기에 무장대가 한차례 경찰지서를 습격했지만 인명피해는 없었다. 서북청년단으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주둔하면서 죽음과 통곡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서북청년단은 광복이후 월남한 사람들이 만든 평남·함북·함남·황해청년회 등 이북 출신 청년단체가 통합해 1946년 서울에서 결성된 반공우익 집단이다. 서청제주지부(단장 김재능)는 1947년 조직됐다. 이들에 의해 자행된 무자비한 테러행위는 제주도민의 감정을 자극해 4·3 발발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서청특별중대는 성산초등학교를 접수해 1년간 주둔했다. 이들은 군복만 입었을 뿐 명찰과 계급장도 없었다. 군번이 없었고 군적에도 이름이 등재되지 않은 '군인 아닌 군인'이었다. 학교 건물에서 숙식하던 이들은 학교 옆 감자 창고에 주민들을 붙잡아 온 후 취조를 했다. 서청 특별중대의 존재는 성산면·구좌면 주민들에겐 악몽이었다. 이들은 주민들을 혹독하게 고문하다 대부분 총살했는데 그 장소가 성산리의 '터진목'과 '우뭇개동산'이었다. 온평리, 난산리, 수산리, 고성리 등 4·3 당시 희생된 성산면 관내 주민 대부분이 이곳 터진목에서 희생됐다. 이외에도 구좌면 세화, 하도, 종달리 등에서도 붙잡혀 온 주민들이 이곳에서 희생된 경우가 많았다. 현재 터진목 초입에는 성산읍4·3희생자 유족회가 2010년 11월 5일에 세운 위령비가 자리하고 있다. 이 위령비에는 추모글과 함께 성산면4·3희생자 467위의 이름이 마을별로 새겨져 있다. 한편 이곳에는 2008년 프랑스의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르 클레지오(Jean Marie Gustave Le Clezio)의 '제주기행문' 일부가 새겨진 빗돌이 자리해 '어떻게 이 아름다운 곳이 학살터로 변했는지?' 그 연유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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