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 작가의 詩(시)로 읽는 4·3] (53)칠오름의 진실은-박효찬

[김관후 작가의 詩(시)로 읽는 4·3] (53)칠오름의 진실은-박효찬
  • 입력 : 2020. 04.02(목)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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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창은 칠오름에 집이 없는데 산다

눈이 쌓인 겨울엔 간장 하나에 밥을 먹어야하고

4월이 되면 붉게 물든 고냉이술 언덕에서 함께 운다

고깔모자를 쓴 칠오름에서

신들의 축제에 지식인을 부르고 역적을 부른다

밤이 되면 먹을 것을 찾아 봉아름으로

목이 마르면 죽창으로 붉은 동백꽃을 꺾었다

무자년 4월

혈흔도 없이 사라져버린 무수한 사람들

칠오름 자연동굴 속 이야기는 흔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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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역시 4·3 당시 피난처였다. 토벌대가 마을로 들이닥치면 주민들은 오름으로 숨어들어갔다. 일제강점기 시절, 봉개동 일대는 일본군 96사단 예하의 293연대본부가 주둔해 있었다. 명도암 뿐만 아니라 주변 오름은 일본군이 주둔하면서 대규모 갱도진지 등 군사시설을 구축하였다. 이곳 역시 4·3 피난처가 되었다. 명도암에 연대본부가 있었기 때문에 명도암오름과 칠오름, 열안지오름, 노리오름 등에도 갱도동굴들을 볼 수 있다. 고냉이술은 칠오름의 북동쪽에 동·서쪽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는 곶자왈 지역이다. 고냉이술에도 진지동굴이 남아있다. 고냉이술 갱도의 길이는 70여m 정도이며 내부에 크고 작은 방 3곳과 통로 2곳이 만들어져 있다. 오름과 오름 사이, 마그마가 흐르던 용암지대였던 곶자왈은 구멍이 쑹쑹 뚫린 바위로 가득한 황무지에 다름 아니었다. 제주도를 피의 공포 속으로 내몰았던 4·3 당시 곶자왈 역시 토벌대를 피해 숨어든 주민들의 피난처가 되어주기도 했다. 거칠고 사나우며 척박했다. 오랜 세월 버려진 땅이었다. 먹을 것 귀하던 시절, 도토리며 양하(襄荷) 같은 구황식물을 아낌없이 선물했다. 고냉이술굴은 용암종유와 용암유석 등 동굴 생성물이 일부 남아 있는 용암동굴이며, 일제 강점기때 일본군이 군사적인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내부를 정비하면서 일부 훼손 되었다. 역시 피난처였다. 칠오름을 칡오름이라고도 한다. 칡이 많은데서 칡오름 또는 칠오름으로 불려온다. 한자로는 칡 갈(葛) 자를 써서 갈악(葛岳)으로 표기돼 있다. 제주어로 칡은 보통 '칙' 또는 '끅'이라고 하는데 일부지역에서는 ' 칠'이라고도 한다. 다른 하나는, 명도암 남쪽에서 내려오는 오름 가운데 일곱 번째 오름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자 표기도 칠봉(七峰) 또는 칠악(七岳)으로 돼 있다. 맨끝의 칠오름이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열돼 있다는 풍수설이다. 조선시대 유학자 김진용(金晉鎔)의 은거지로 유서가 깊은 명도암은 봉개동에서도 2㎞쯤 올라간 중산간에 형제봉·열안지오름·칡오름으로 둘러싸인 한갓진 마을이다. 1965년 10월 탄신 6회갑 기념으로 이숭녕(李崇寧)의 명문으로 된 '명도암김진용선생유허비(明道菴金晉鎔先生遺墟碑)'가 명도암오름에 건립되었다. 아늑한 분지를 이루며 병풍 구실을 하는 이들 오름들 가운데 칠오름은 마을의 북동쪽, 번영로에서 올라오는 간이 포장도로 동쪽에 길게 솔수평이 능선을 흘리고 누워있다.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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