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1)판관 김구

[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1)판관 김구
잘 알려지지 않은 786년전 '돌의 고향' 제주도의 은인
  • 입력 : 2020. 03.09(월) 00:00
  • 편집부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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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를 시작하며


가까이 있어서 보잘 것 없고 멀리 있어서 희미하던 우리 곁의 문화가 이제는 아쉬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 무엇이 있었고, 익숙한 것들이 언제 사라졌는지도 분명치 않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약동하는 시간 속에서 김유정의 '다시 쓰는 21세기 제주문화사전'이라는 이름으로 연재를 시작한다. 오늘의 시간은 결코 돌아오지 않으며, 역사는 내일에 이르러 그런 오늘을 새롭게 비추는 거울이 될 것이다. 현재의 제주문화도 금방 과거 속으로 잊힐 것이다. 그러나 문화도 자연 선택적으로 새로운 의미와 해석을 통해 시대와 만나게 되면 다시 활력을 찾게 될 것이다.

제주성주를 원나라에 보내면서 김구가 쓴 고주표.



#석주명, 김구는 제주도의 은인

제주는 돌의 고향이라는 말에 걸맞게 돌담의 종류를 나열해 보자. 돌담은 사람이 힘으로 쌓은 담장이라는 점에서 인공물이다. 집의 돌담으로는 올레담·집담(축담)·우영담·통싯담이 있고, 바다에는 원담(갯담)·포구담이, 밭에는 밭담·산담·축담(절개지)·벡캣담이, 들에는 잣성(상잣성, 중잣성, 하잣성)·캣담이 있다. 돌담 중에서는 밭담은 그것의 조성된 기록이 분명하여 역사적인 의의를 지닌다. 그렇다면 밭담은 누가 제도적으로 만들어 시행했을까. 많은 사람들이 밭담과 함께 다른 돌담에도 호기심어린 눈으로 관심을 갖지만 정작 그 밭담을 만들게 한 장본인은 잘 모른다. 제주도를 지극히 사랑했고 나비박사로도 유명한 석주명의 '제주도 수필(濟州島 隨筆)'에 그 주인공이 간략하게 소개돼 있다.



문화도 새로운 의미와 해석을 통해 활력을 찾아
돌담에 관심 갖지만 그 밭담을 만든 장본인 몰라

직언을 피하지 않아 세상 사람들 모두 그를 존경


부안에 있는 판관 김구 묘역.



김구(金坵). 고려 때의 사람으로 판관(判官)으로 왔던 이. 당시(고종 21년, 1234년) 밭의 경계가 불분명하므로 힘없는 백성들의 고통이 대단하였다. 김 판관의 명(命)으로 돌담을 쌓아 경계를 분명케 하고는 편하게 되었다는데 후세와 와서 돌담의 효용을 생각하면 김구는 제주도의 은인이다. 그러나 이이가 그리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다. 자(字)는 차산(次山), 초명(初名)은 백일(百鎰), 부령인(扶寧人), 어려서부터 시문(詩文)을 잘하고 무화과언(無華寡言, 검소하고 말을 아끼는 것)하고 국사(國事)를 논(論)할 때는 솔직하고 용감하였다. 그가 작성한 표사(表詞,임금과 신하가 주고받는 글)는 아름다워 원(元, 몽고)의 학사(學士) 왕악(王 )은 김구의 얼굴을 못 보는 것을 한(恨)했다.



#김구의 생애

김구의 본관은 부령(扶寧)으로 지금의 전라북도 부안(扶安)이다. 호는 지포(止浦), 고려 희종 7년(1221) 아버지 김정(金挺)과 어머니 김씨 사이에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용모가 단정하면서도 중후하여 도량과 기량이 넓고도 깊었다. 네 다섯 살에 경서(經書)와 역사서(歷史書)에 두루 통했고, 자라면서 글을 잘해 당시 사람들은 신동이라고 불렀다. 12세에 우수한 인재로 인정받아 진사 시험을 준비하는 조사(造士)에 선발되었고, 22세에 문과에 2등으로 뽑혔는데, 당시 주시험관이었던 지공거(知貢擧) 김인경(金仁鏡)이 1등으로 뽑지 못한 것을 한으로 여겼다. 당대의 문장가 백운거사 이규보(李奎報)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뒤를 이어 문장의 저울대를 잡을 사람은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급제 후에도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뜻을 세우다가 고종 21년(1234) 24세에 정원부 사록(靖原府 司錄)에 임명되었으나 악감정을 품은 같은 고을 사람 황각보(黃閣寶)가 유사(有司)에게 참소(讒訴) 함으로써 겨우 보직을 바꿔 제주 판관이 돼 외직으로 나갔는데 제주 사람들이 공이 청렴하고 명민함을 알아보고 칭송이 자자했다. 세월이 한 참 흐른 지금 김구가 행한 당시 제주에서의 치적은 오늘날에 더욱 그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부안에 있는 판관 김구 묘역.

전해오는 조선 초기의 사료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당시 제주도의 삶의 모습이 생생하게 표현되고 있다. "풍속을 별나고 군졸은 사나운데 백성은 어리석어서 기쁘면 사람이 되고, 성내면 짐승이어서 제어하기 힘들다. 땅은 척박하고 백성은 가난하다. 돌을 모아서 담을 쌓았다. '동문감(東文鑑)'에, 그 땅에 돌이 많고 건조하여 본래 논은 없고 오직 보리·콩·조만이 생산된다. 그 밭이 예전에는 경계의 둑이 없어서 강하고 사나운 집에서 날마다 차츰차츰 먹어 들어가므로 백성들이 괴롭게 여겼다. 김구(金坵)가 판관이 되었을 때에 백성의 고충을 물어서 돌을 모아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드니, 백성들이 편리하게 여겼다."

이 기록은 조선 효종 때 제주목사 이원진(李元鎭, 1594~?)의 '탐라지(耽羅誌)'에 고스란히 실려 있다.

1239년 제주 판관으로 5년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오니 한림원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서장관(書狀官)이 돼 몽고에서 2년을 지내고 31세(1241)에 고려로 돌아왔는데 이 때 쓴 시 네 수가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돼 있다. 저서로는 '북정록(北征錄)'이 전한다. 그때 지은 네 수의 시 중 '철주를 지나며, 過鐵州'라는 시는 항몽의식이 담긴 비장한 시이다. 철주는 오늘날 평안북도 철산군 서림이다.

이 시는 대몽항쟁기에 쓴 시로 젊은 날의 혈기가 역력한데 고종 18년(1231) 몽고의 원수(元帥) 살례탑(撒禮塔)이 함신진(咸新鎭)을 포위하여 철주를 함락시킬 때 당시 고을의 원님인 이원정(李元禎)이 끝까지 항전하다가 싸울 힘이 다하자 남은 창고에 불 지르고 처자와 함께 그 불 속으로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한 내용이다. 김구는 철주를 지나면서 비극으로 생을 마감한 그 원님의 넋을 기리고 항몽의 귀감으로 삼고자 했다.

이처럼 김구가 항몽의식을 가졌음에도 훗날 원나라로 보내는 '표전문(表箋文)'을 쓸 때는 원나라 황제에게 호소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며 고려의 자존심을 최대한 지키기도 하면서 원나라 황제를 유려한 문장으로 잘 설득하여 국익 외교를 펼치는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기도 했다(김병기, 2019).

김구는 빠르게 문필의 힘으로 여러 직에 승진하면서도 청요직에 머물렀는데 그가 지낸 직위를 보면, 1269년 59세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정2품), 60세에 정당문학(政堂文學, 종2품) 등을 역임했고, 원종 14년(1274) 63세에 참지정사(參知政事,종2품)로서 지공거에 임명되었다. 충렬왕 원년(1275)에 첨의부 찬성사(僉議府 贊成事, 정2품) 등에 임명됐으나 인생은 아쉬운 미련을 남기는 것인지 충렬왕 4년 공의 나이 68세가 된 1281년 9월 26일 병이 깊어 개경(開京)의 집에서 별세하자 임금은 부의(賻儀)를 내리고 시호를 문정(文貞)이라고 했다. 김구는 재상의 자리에 10년이나 있으면서 사리(私利)를 꾀하지 않았고 사직(社稷)을 염려하며 감히 직언을 피하지 않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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