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미의 하루를 시작하며] 미래의 꿈을 과거에 묻다

[김윤미의 하루를 시작하며] 미래의 꿈을 과거에 묻다
  • 입력 : 2020. 02.12(수) 00:00
  •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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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십대 청춘, 매일 책을 머리에 베고 잠들었던 시절이 있었다. 용돈이 들어오거나 아르바이트 월급이 들어오는 날이면 제일 먼저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샀다. 그리고는 첫 페이지에 언제, 어디에서, 왜 이 책을 사게 되었는지 기록했다.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심장과 맞닿는 문장이 있으면 밑줄을 긋고 덧붙여진 나의 생각을 귀퉁이에 새겨 넣곤 했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난 후에도 책을 꺼내어 보면 그 시간의 내가 어떤 환경에 처했었고 어떤 생각을 하며 일상을 보냈는지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는 가히 책들과 함께 의식이 흘러갔던 시기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시간이 흐르며 유독 이사가 잦았던 탓에 어느 순간부터는 책이 가장 큰 짐이 되었다. 결국 서울에서 작은 자취방을 구하고 잠시 책들을 빈 창고에 은닉시켰다. 그런데 다음해 태풍으로 그 창고가 물에 잠겼다. 소식을 접하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청춘이 수장 당한 것 같은 상실감으로 내내 아팠다.

지난 일들은 훌훌 털어버리라고 한다. 현재를 살아야 한다고, 미래를 꿈꾸며 살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의 현재는 과거의 주춧돌 위에 세워진 세상이다. 지난 기억은 사건들 사이에서 경험했던 감정을 넘어서 미래의 존재를 증명하는 근간이 된다.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에게 치유의 과정이란 잊는 것이 아닌 몽우리가 꽃으로 피어날 때까지 바라보듯 기억을 발화시켜 받아들이는 시간일 것이다. 아픈 기억은 유독 오래 남고 불편한 진실은 애써 외면해도 불쑥 불쑥 마주하게 된다. 저마다 기억을 발화하는 방식은 다를 것이다. 수많은 예술가들은 다양한 그들만의 방식으로 애써 기억을 표출하고 기록한다.

나라의 기억은 어떠한가. 아픈 기억이 없는 나라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지난 아픔을 기억하고 반성하며 좀 더 나은 미래를 꿈꾸었다. 지난 역사가 현재의 삶에 피해를 주지는 않지만 내일을 예견하는 영향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다. 아픈 역사, 재앙과도 같은 인재, 우리가 끝끝내 기억해야 하는 이유는 비극을 잊지 않고 또 한 번 미래를 꿈꾸기 위한 약속인 것이다. 그러하기에 기억과 망각, 그 간극사이에서 하루하루 바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수면 위에 던지는 작은 돌멩이의 파장처럼 망각을 경고하는 기억의 문화는 여러 형태로 존재하고 더 다양하게 진화하고 있다.

이따금 지난날들을 되돌아볼 때면 어김없이 물에 잠긴 책들이 떠오르고 이내 눅눅해진 그 시간들이 습기를 머금고 들러붙는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니 책들을 무거운 짐으로 치부했던 그때의 나를 후회해도 소용없다. 그럼에도 여러 가지 가설은 때때로 뇌리를 스쳐지나가고 미련한 질문들을 던지곤 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리석어보이는 질문들이 나에게는 그 시간을 기억하는 또 다른 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해야 할 것을 기억하는 것은 함께 마음이 아려오는 것, 아픔의 언저리가 짐작되어 심장이 저릿한 것, 시시해 보여도 그런 마음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올해도 매화는 피었건만 세계는 아픈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다시, 미래를 꿈꾸기 위해서 우리는 원인과 방법을 찾고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오늘도 하루치의 기억이 쌓였다. <김윤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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