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50)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50)
  • 입력 : 2020. 02.06(목) 20:00
  • 편집부 기자 hl@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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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18. 행복이라는 화두(최종회)



전화를 끊고 나서도 용찬은 한참동안 머리가 멍했다.

찬찬히 생각해보니 그제야 대호가 금산에게 당하지 않고 제주를 빠져나가게 된 사유의 퍼즐이 맞춰졌다.




세월은 속절없이 지나갔다. 꽃이 피었는가 했더니 파랗던 잎새가 어느새 말라 떨어져 바람이 이끄는 대로 정처 없이 굴러다녔다.

사무실에서 신문을 보던 용찬은 한 여행사가 낸 광고에 눈길이 꽂혔다. 잘못 보았나 하고 눈을 의심하며 안경을 고쳐 쓰고 다시 보았으나 틀림없는 대룡관광여행사였다.

문득 10여 년 전 파견 근무할 때의 일이 생각났다.

장종필이 중국으로 진출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그 일이 있은 후 누구에게서도 왕금산의 소식은 듣지 못했다. 그때 대룡여행사도 출입국관리법 위반 등 블법 영업으로 면허가 취소되어 문을 닫았고 왕금산은 지명수배 상태였다. 그런데 10여 년 세월이 흐른 후 같은 상호를 사용한다면 왕금산과 필시 관련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용찬은 전화기를 꺼내 여행사의 전화번호를 여러 번 확인하며 꾹꾹 눌렀다.

곧 상냥한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예. 대룡관광여행사입니다."

"예, 저 물어볼 게 있어서 그런데요? 그 여행사 언제 개업했나요?"

"왜 그러시죠?"

"사람을 찾고 싶어서요."

"언제부턴진 잘 모르겠고요. 본사는 일본에 있어요."

일본으로 간 왕리화 얼굴이 떠올랐다.

"혹시 사장님 성함 알 수 있을까요?"

"전 잘 모르구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점장님 바꿔 드릴게요."

잠시 후, 연결음이 가더니 나이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점장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혹시, 일본 본사 사장님 성함을 알 수 있을까요?

"누구시죠?"

"예. 옛날 대룡여행사 사장님을 좀 아는 사람입니다. 혹시나 내가 찾는 사람이 맞는가 해서요."

"그러세요? 사장님 성함은 문대호이십니다."

용찬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깜짝 놀랐다. 사라진 문대호가 일본에 있을 줄이야?

"문대호요? 아. 내가 찾는 분 맞군요. 혹시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사장님. 웬만해선 통화하기 어려워요, 연락처 주시면 시간 되실 때 연결할 수 있도록 도와 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도 용찬은 한참동안 머리가 멍했다. 찬찬히 생각해보니 대호가 금산에게 당하지 않고 제주를 빠져나가게 된 사유의 퍼즐이 맞춰졌다.

삽화=고재만 화백



그렇게 기다리던 전화는 퇴근하고 거실에서 9시 뉴스를 보고 있을 때 걸려왔다.

전화기 너머 들려온 목소리는 무척 고무되어 있었다. 세월이 지났어도 변함없는 문대호의 목소리였다.

"형! 이게 얼마만이지? 나 문대호야. 반가워요."

"내가 알던 문대호 맞구나?"

"형은 지금 어디 살아?"

"응 건강이 안 좋아져서 신문사 사표 내고 고향에 돌아와 인터넷 신문 운영하고 있어."

"결혼했다는 소식은 왕 회장한테 들었어요. 장석규 씨 딸이라며?"

"응. 그래."

"형. 행복해?"

"글쎄?"

용찬은 순간 행복한가 자문했지만, 늘 일에 쫓기며 살아온 인생인데 행복하곤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행복은 왕금산의 화두가 아니었던가?

"난 무지 행복해. 그때 여자 친구와 애 둘 낳고 잘살고 있어. 살고 보니 돈이 전부는 아니더라고요.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삶이 즐거우면 거기가 천국 아닌가요?"

행복 바이러스가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듯했다.

"그래. 문 사장 목소리에서 행복이 느껴지네. 헌데 왕 회장도 일본에 있어?"

"당연히 있지. 헌데 형. 왕 회장은 왕리화 씨야."

"오 그렇구나. 그럼 왕금산은 지금 어딨는데?"

무엇이 우스운지 문대호는 껄껄 웃었다.

"핫핫핫. 왕금산은 죽었잖아요?"

용찬은 대호의 여유 있는 말투에서 거짓말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아, 공소시효가 남아서 그런 거지?"

"형, 아무튼 왕금산에 대해선 아무도 몰라요. 그리고 그땐 정말 미안했어요. 절박한 사정이라 어쩔 수 없었어요. 그건 그렇고 나 다음 달 제주에 출장 갈 예정인데 그때 한번 만나요. 바빠서 오늘은 이만 끊겠어요."

문대호는 입장이 난처했는지 황급히 통화를 끝냈다.

금산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왕금산은 죽지 않아. 반드시 일어선다."

용찬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확신했다.

"왕금산, 살아 있구나."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이기에 언젠가 자신 앞에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가 움텄다. 어떤 모습일까? 그러면서 마주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웠던 금산과 늘 쫓기고 피하면서 타협했던 자신을 대비시키자 용찬의 얼굴엔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별이 된다. 그 별은 자라면서 다른 행성들을 만나고 관계를 맺고 인연을 만들면서 우주로 성장한다.

나무가 햇볕과 바람을 만나야 싹을 트고 꽃을 피우듯이, 꽃이 져야 잎이 생기고 열매를 맺듯이 인간은 주어진 시간을 살면서 늘 변화무쌍한 상황과 만나면서 여물어간다.

인생이란 저마다 겪는 시간여행이다.

시간 여행을 한다는 것은 별을 만나는 일이고 다른 우주와 교류하는 행위이다.

그 여행 속에서 많은 사람들, 환경들, 상황들을 만나면서 저마다의 역사를 만들어 내고 위대한 문화를 만들어 낸다. 우정과 사랑, 욕망과 죄악, 미움, 슬픔이라는 것도 다 다른 우주와의 교유 속에서 만들어진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크로노스의 시간이다.

지구에서의 여행을 끝낼 즈음 되면 누구에게는 그것이 후회스럽고 고통스럽게 기억되기도 하지만, 카이로스를 붙잡은 사람들에겐 아쉽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되살아나기도 한다.

한 인간이 지상에서 사라진다고 해서 하나의 소우주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육신이 지구라는 행성을 떠났을 뿐 그가 남긴 많은 인연과 관계들은 공존하면서 또 다른 분화된 우주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아득한 시공간 저편에서 보면 인간 만사가 먼지처럼 부질없는 것이다. 그러니 주어진 시간에 감사하며 인생을 즐기자.



어제 핀 꽃이

오늘은 빈 가지로구나

너희도 보라

인간 적멸(寂滅)이 저러하거늘

부생(浮生)은 하루살이처럼 사라지는 것을.



용찬은 칼럼의 마지막 부분을 사명당의 오도송으로 정리했다.

매달 두 편씩 중앙지에 칼럼을 마감일에 맞추어 보내는 것도 이젠 힘겹다 생각하며 보내기 버튼을 눌렀다.



문대호와 통화 이후 행복이란 화두가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만나자던 문대호는 한 달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일본으로 전화했으나 부재중이라 통화도 안 되었다. 대신 왕리화가 전화를 받았다.

"오빠는 사업을 나한테 넘겨주고 어디론가 떠났어요. 찾지 말라는 것으로 봐서 아마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나 봐요."

왕리화는 여전히 진취적이었고 활달했으며 말투에선 중년의 원숙미가 묻어나왔다.

"아직도 가끔은 용찬 오빠 생각나요. 젊은 날 좋은 추억 주어서 고마워요. 행복했어요."

자신으로 인하여 누군가 행복을 느꼈다면 그 또한 복 받는 일 아닌가 하는 생각에 용찬은 그날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진정한 행복은 느끼는 게 아니라 내면으로부터 피어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왕금산은 입산 면벽하여 도를 구하고 있을까? 적지 않은 나이에 인생의 단맛과 쓴맛을 경험한 그가 깨우친다면 큰 스님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아(眞我)를 발견하는 것에서 진정한 평화를 얻고 그게 참 행복의 샘물이 된다는 걸 터득했을까?

인간은 추억을 먹고 사는 동물이기에 언젠가 용찬 앞에 나타날 것이라는 기대가 움텄다. 어떤 모습일까? 그러면서 마주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웠던 금산과 늘 쫓기고 피하면서 타협했던 자신을 대비시키자 용찬의 얼굴엔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밖에서 아내의 채근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 안 끝났어요?"

"다 됐어."

외출 준비를 끝낸 해연이 서재로 들어왔다. 용찬은 컴퓨터의 전원을 끄고 자리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있는 윗도리를 꺼내 걸쳤다.

"그렇게 배고파?"

"점심 먹고 정기연주회 연습 가야 해요."

사랑스러운 딸 소연이 머리를 곱게 단장하고 서재로 달려왔다.

"아빠 나도 점심 먹고 피아노 학원 갈 거야."

용찬은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는 딸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래요? 우리 예쁜 공주님 무얼 먹을래?"

"나 짜장면 먹을래."

"그래, 아빠도 오랜만에 짜장 생각이 간절했는데. 통했네."

"참. 신시가지 쪽에 대룡반점이 개업했다는데 가 보았어요?"

"대룡반점?"

"젊은 시절의 추억도 되새길 겸 거기로 가요."



시내 거리는 다시 중국인들로 넘쳐났다. 중국어로 된 도로 간판은 늘어났고 상점가 주변은 소란스러워졌다. 무단횡단으로 인해 교통사고가 빈번해지자 4차 선 도로마다 보행 차단 울타리가 설치되었다.

승용차가 아파트를 벗어나 6차선 도로에 들어섰는데 갑자기 인도에서 쇼핑한 물건꾸러미를 든 젊은 여인네가 뛰쳐나왔다. 맞은편 버스 있는 쪽으로 가려고 보행 차단 울타리를 넘으려는 바람에 차들이 길게 멈춰 섰다. 클랙슨 소리가 크게 울렸으나 다리가 짧아 포기한 그 여인은 아랑곳없이 유유히 돌아가 떠들며 이동하는 무리 속으로 숨었다.



갑자기 한줄기 바람이 불어오더니 관광객이 앉았다 떠난 자리에서 비닐포장지 여러 개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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