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관후 작가의 시(詩)로 읽는 4·3] (41)선흘곶 답답한 굴속(김석교)

[김관후 작가의 시(詩)로 읽는 4·3] (41)선흘곶 답답한 굴속(김석교)
  • 입력 : 2020. 01.09(목)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선흘곶 목시물굴 캄캄한 죽음의 냄새

눈을 감아도 보인다, 귀를 막아도 들린다

안개 속처럼 흐릿한 세월 시간도 이곳은 비껴간다



굴 밖으로 끌려나온 사람들 무릎 꿇린 채 총살당하고

굴속에 몸 숨겼던 사람들 수류탄 터져 목숨 끊기고

여자들과 아이들 북촌리 억수동까지 끌려가

따르르륵 기관총 맞아 몰살당하고

노인들 또 잡혀가 고문당하고



봄꽃들 앞 다투며 피는 이 4월에

죽음의 그림자 서성거리는 선흘곶에 오면

새들의 지저귐도 피 토하는 울부짖음이지

가지마다 움트는 생명의 붓순도 총알로 보이지



죽은 자들 말이 없고, 죽인 자들 미쳐 날뛰는

이 4월, 선흘곶에만 오면 목시물굴에만 오면

그 날의 생지옥이 나를 휘감아 나는 그만 미쳐 버리겠다

----------------------------------------------------------------------------------

1948년 11월 20일 선흘리가 불타버리자 주민들은 선흘곶의 자연동굴에 숨어들거나 들판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도톨굴, 목시물굴, 벤벵듸굴, 대섭이굴 등지에 숨어있던 주민들은 토벌대에 의해 발견되고 수십 명이 희생되었다. 해변마을로 내려간 주민이나 야산에 은신했다가 붙들려 온 주민들 중에도 도피자가족 등의 갖은 이유로 희생을 당한다. 일부 주민은 함덕 대대본부로 끌려갔고, 그들 중 다수 주민들은 서우봉이나 북촌리 억물 등지에서 총살당한다. 또한 소개령에 따라 함덕, 조천 등지로 피난 간 주민들도 도피자 가족이란 이유로 함덕리 모래밭 등지에서 많은 희생을 치른다.

1949년 봄이 되자 주민들은 낙선동에 성을 쌓고 집단 거주했다. 이러한 돌성은 산간마을은 물론 해변마을까지 무장대의 습격을 방비(防備)한다는 명분으로 대부분 마을에 축성을 했다. 주민들과 유격대와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통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전략촌의 한 유형이었다. 축성작업은 주민들을 동원해 이루어졌다. 성을 쌓는 작업은 주둔소를 쌓는 작업보다 오히려 더욱 힘든 일이었다. 해안 마을로 피난 갔거나 감금됐던 주민들을 강제로 동원한 축성 작업은 1949년 봄 한 달 동안 계속됐다. 낮에는 경찰의 감시 하에 성을 쌓았다. 그리고 어두워지면 함덕으로 내려가자고, 다시 아침이면 낙선동에 성을 쌓으러 오는 생활을 한 달 정도 했다. 1949년 4월 성이 완공되자 선흘리 주민들은 겨우 들어가 잠만 잘 수 있는 함바집을 짓고 집단적으로 살았다. 일종의 수용소나 마찬가지였다. 성 밖 출입도 통행증을 받아야 가능했고 밤에는 통행금지였다. 이 당시 마을 주민 중 젊은 남자들은 무장대 동조세력이나 도피자가족으로 몰려 이미 많은 희생을 치른 상태였다. (김관후 작가·칼럼니스트)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2359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