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문의 에세이로 읽는 세상] 밤으로의 여로

[허상문의 에세이로 읽는 세상] 밤으로의 여로
  • 입력 : 2019. 12.04(수) 00:00
  •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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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에 장끼들이 뛰어다니고 멀리서 뻐꾸기들이 애달프게 울어대는 낮의 시간도 좋지만, 세상과 사람들이 적막과 고요의 시간에 빠져드는 밤의 시간이 나는 한없이 좋다. 이 시간은 오직 세상에서 나 혼자만의 시간이다. 낮의 소음과 갈등과 경쟁으로부터 모두 결별하는 시간, 나는 황제가 되고 거지가 되고 천사가 되고 악마가 된다.

그동안 내 곁에서 서성이다 떠나간 사람, 다 채우지 못하고 지나간 아쉬운 시간, 멀리 하늘나라에서도 나를 지켜보고 계실 부모님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이 새벽안개같이 솟구쳐 오른다. 세상은 깊은 침묵과 어둠에 빠져 있지만, 적멸의 시간은 나를 고요와 평화와 안식으로 이끈다.

밤은 아름다운 시간이다. 이곳에는 달과 별과 술과 촛불이 있다.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들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니다. 당신이 오지 않아도 이들은 의미가 있다. 온 낮을 괴롭혔던 근심은 떠돌이 유민들처럼 천막을 거두고 어딘가로 조용히 떠나간다. 어둠은 소란스럽던 세상에 위안과 평화를 가져온다.

서산에서 타오르던 노을을 떠나보내고 모두 돌아갈 고향 생각에 잠기게 된다. 하늘이 어둠에 길들면 세상을 보는 눈도 깊어지고 땅은 두 손 내밀어 힘겨웠던 시간을 어루만져 준다. 발밑의 대지는 눅눅한 슬픔과 고통으로 젖어 있지만, 힘들 때 어쩔 수 없이 다시 기대야 하는 누군가의 어깨 같은 곳이다.

하루가 끝나고 하루가 떠나고 어둠은 밤의 날개 위에서 퍼덕이며 내린다. 어둠은 밤의 어깨 위에 자신의 몸을 기댄다. 철새가 제집으로 돌아가다 흘린 깃털 하나 천천히 떨어지듯 마을의 집들에서는 등불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 위로 달빛들이 휩싸여오기 시작한다. 등불과 달빛은 알 수 없는 슬픔을 자아내고 서글픔과 그리움을 가져온다. 이때 아름다운 영혼의 노래를 준비하는 시인의 노래는 세상에 지친 사람들의 근심을 가라앉힐 수 있다. 이제 모두 깨달음의 시간에서 자신의 영혼을 일깨운다.

사람들은 빛은 희망이고 어둠은 절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고난 없고 그늘 없는 삶을 바라지 마라. 고난은 견딜 수 있을 만큼 주어지는 아픔이고 보람은 견뎌낸 만큼 얻어지는 기쁨이다. 오늘 내 몸이 수고스러워야 내일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것이 아닌가. 무엇이든 쉽게 구하려 들지 마라. 쉽게 얻어지는 것은 항상 쉽게 버려지고 쉽게 나타나는 사람은 쉽게 떠나가더라. 눈물 없는 삶을 바라지 마라. 울지 않고는 태어날 수 없듯이 고통과 슬픔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더라. 이 기막히게 평범한 진리를 인생의 막바지에 이르게 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앞만 보고 뒤를 되새기지 못하면 지혜를 구하기 어렵다. 어둠 속에서 제 몸으로 강렬한 빛을 발하는 별이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이고, 절망 속의 희망은 스스로 떨쳐 일어나는 사람에게만 진정한 희망이다. 어둠과 절망 속에서 깨어나오는 빛과 희망이야말로 진정한 아침이다. 빛이 오지 않는 어둠이 없듯이 아침이 오지 않는 밤은 없다.

어둠의 밤은 아침을 향하여 더욱 더 깊어간다. 나는 영원으로 이어지지 못할 지금의 시간에 대해 절망한다. 그렇지만 나는 이 밤을 보내고 다시 새로운 날을 준비해야 한다.

<문학평론가·영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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