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바다와 문학] (31)김광렬 시 ‘성산포에서’

[제주바다와 문학] (31)김광렬 시 ‘성산포에서’
“수평선 너머 아픔 잠재울 곳 있을까”
  • 입력 : 2019. 11.29(금)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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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일출봉이 보이는 한겨울 광치기해변. 김광렬 시인은 '성산포에서' 연작에서 바다와 어머니에 빗대 제주의 역사와 삶을 노래했다.

죽은 땅 잿더미 위 핀 제주
거센 풍랑에 좌절되는 꿈
“희미한 등불만 있으면…”

그에게 바다는 여인들의 기구한 생애가 출렁이는 공간이다. 바다에 의지해 크나큰 슬픔을 견딘 이들이 있었으니, 그중 한 사람이 '이모'다. 4·3사건 나던 이듬해 '빨갱이'인줄 모르고 결혼했던 남편은 급살맞아 죽었고 둘째 남편과도 생이별했다. 이모는 썰물 때면 밭일을 하다 멈추고 바다로 나가 그 시름을 견뎠다. 죽은 땅 잿더미 위에서 피어난 '제주도', 남정네들 가버리고 없는 긴 세월 동안 가족을 먹여 살리는 고통을 떠안은 건 여인들이다.

'휘유 어쩌다 어머니 한숨 소리가/ 말해요 휘유 세상은 다 그런 것/ 점점이 눈물꽃 떨어뜨리다 휘유/ 가고 마는 세상 그렇게 말해요 어머니가/ 어머니 어머니 말해요 그렇게 어머니가/ 어머니는 결코 입 열지 않지만/ 휘유 어머니가 말해요 휘유라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소리'('성산포에서 1' 중에서).

1988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했고 3년 뒤 시집 '가을의 시'(1991)를 묶어낸 김광렬 시인. 성산읍 신산리가 고향인 시인은 첫 시집의 '성산포' 연작에서 바다와 어머니에 빗대 이 땅의 역사와 삶을 노래했다.

시인은 성산포 바닷가에 선 '나'를 통해 우리들 삶은 무엇이었나('성산포에서 2')를 묻는다. 거기엔 흔들려 버려진 고깃배가 있다. 그것이 우리의 처지와 다를 게 있나. '나'는 어머니처럼 한숨을 내쉰다. '이 섬나라도/ 결코 조용하지만은 않고/ 둥둥둥 도처에서 북을 울리며/ 무엇인가 무엇인가 절실히 노래하지만/ 노래는 하늘 끝 닿지 못하여/ 차르르 부서져내리는 물보라'. 이루려 애쓸수록 거센 풍랑이 그것을 좌절시킨다. '수평선 저 너머/ 성산포 아픔 잠재울 나라'('성산포에서 3') 있을까. 아무 데도 떠날 곳 없는 처지인 걸 알지만 꿈꿀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다.

오늘도 성산포엔 해가 떠오른다. 시인은 두번째 시집 '희미한 등불만 있으면 좋으리'(1999)에 담긴 '성산일출'에서 '둥그런 해가 세상살이 아픈 껍질 벗겨내'고 '뼈 부딪치는 소리내며 바다 위로 두둥실 떠오른다'고 했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생을 그린 절창 너머 시인은 '나'의 목소리를 빌려 '성산포에서'연작처럼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준 이 땅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다.'나 죽어서도 섬을 떠나지 않으리/ 둥둥 제주 바다가 울려대는/ 북소리와 살리'라는 다짐이다. 표제가 등장하는 시집 맨 끝의 '섬에서'란 시로 '희미한 등불만 있으면 좋으리/ 불빛 아주 없어도 절망하지 않으리/ 캄캄하게 캄캄하게/ 어둠 캐며 살아가리'라고 끝을 맺는다. 그가 태어난 마을이 이즈음 느닷없이 닥친 개발 현안으로 상처 입고 있는 시절이라 20년 전 발표된 시의 마지막 구절이 한층 애잔하게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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