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39)

[강준 장편 연재] 갈바람 광시곡(39)
  • 입력 : 2019. 11.21(목) 2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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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 작/고재만 그림

13-3. 하나도 프로젝트



"난 정말 편안히 살고 싶은데 말이야. 세상이 날 그렇게 놔두지 않는단 말이지. 한편으로 생각하면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모른 척하는 것도 그간 받은 은혜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도 같고 말이야."




편액 속엔 요상한 모양의 4개의 글자가 있었지만, 그것이 청나라의 유명한 서예가 판교 정섭이 쓴 난득호도(難得糊塗)라는 것을 용찬은 금방 알아냈다.

연초가 되면 각 신문사에서 신년 휘호로 자주 쓰는 글귀였다. 흘휴시복(吃虧是福, 손해 보는 것이 복 받는 것이다)이라는 대구와 함께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성어다. 그 밑에는 잔잔한 글씨로 난득호도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삽화=고재만 화백



총명하기는 어렵고, 어리석기도 어렵다(聰明難,糊塗難)

총명한 사람이 어리석은 척 하기는 더욱 어렵다(由聰明轉入糊塗更難)

마음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서는 순간 마음이 편해지며(放一著, 退一步, 當下心安)

뜻하지 않고 있노라면 후에 복으로써 보답이 올 것이다(非圖後來福報也)



전형진은 매일 아침, 이 글자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 마음 놓고 한 걸음 물러서는 순간 마음이 편해지며 뜻하지 않고 있노라면 복 받을 것이라는 문구는 전형진의 행동과는 전혀 반대되는 것 아닌가? 하기야 좌우명이라는 것이 평시에 이루지 못하니 그걸 목표라도 삼아야 위로받는 것이리라. 마치 조폭들이 팔뚝에 '차카게 살자' 새기고 다니는 것처럼. 난 그렇게 못하니 너희들은 그렇게 하라는 상대를 위한 엄포라고 용찬은 짧은 순간에 생각했다.



"예. 압니다."

"난 정말 편안히 살고 싶은데 말이야. 세상이 날 그렇게 놔두지 않는단 말이지. 한편으로 생각하면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모른 척하는 것도 그간 받은 은혜에 대한 도리가 아닌 것도 같고 말이야."

말을 하면서 그는 용찬의 표정을 읽으려는 듯 날카롭게 바라봤다. 마땅한 대꾸를 찾지 못해 우물쭈물 하는데, 마침 여직원이 커피를 가져와 탁자 위에 놓고 나갔다.

용찬은 전 지사가 무슨 의도로 말을 하는지 간파했다. 자기는 죽을 때까지 도정에 간여해야겠으니 너희들은 그리 알라. 내가 아니면 돌아가던 세상은 멈춰 설 것이고, 나보다 더 잘난 놈은 없으며, 남 잘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전형적인 제주도 엘리트들의 모습이라는 걸 용찬은 제주 사람들을 만나면서 여러 번 느꼈다.



제주인들은 육지와의 교류가 많지 않을 때는 도둑 없고 거지 없으니 대문이 필요치 않았다. 가난했지만 정겨운 삶을 살았다. 척박한 땅을 일구면서도 어려운 일은 수눌며 (품앗이하며) 도왔고, 이웃에 제사가 있으면 보리쌀로 부조를 했고 돌담 너머 차롱으로 식게 퇴물(제사 음식)을 나누며 살았다.

그러던 것이 육지에서 사람들 왕래가 많아지면서 일 년 농사지은 것을 도둑맞고, 돈 빌려 가면 갚지 않고, 온정을 베풀면 사기를 당했다. 순진한 섬사람들은 이런 일을 여러 번 당하게 되자 남을 믿지 않게 됐고, 결국 혈연, 지연, 학연 등으로 뭉친 괸당이라는 울타리를 치면서 자신들을 보호했다.

제주민들은 고려 시대 삼별초가 패망한 1273년부터 목호의 난이 평정된 1374년까지 백년 간 원나라(몽골) 다루가치(達魯花赤)의 직접적 통치를 받으면서 순진무구한 혈통에 기마족의 유전자가 섞이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영특한 유배인들의 피와 섞이면서 권력 지향의 반골 기질까지 물려받았다. 이러니 이웃이 잘 되면 배가 아파 훼방을 놓았고, 남존여비의 유교사상에 부인을 구박하기 일쑤였다.

그런 선인들의 피를 물려받은 때문인지 부끄럽게도 제주인의 이혼율이 전국 최고이고 중앙 부처에 투서하는 사람도 제일 많다.

제주에선 이당 저당해도 괸당이 최고란 말이 생겼다. 선거에서도 당과 정책보다 자신과 엮어진 인물이 우선이니 무소속이 많이 배출되기도 했다. 이런 괸당 문화가 한 물 간 정치인에게는 영향력을 발휘할 자산이 됐다.

용찬은 그런 전 지사가 측은하게 생각됐다. 연예인이 팬들에게서 잊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우울증에 걸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 년간 4천만 명이 들어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름다움으로 각광 받던 세계 유명 관광지가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인해 교통과 소음과 쓰레기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건 아시죠?"



"저를 보자는 이유가 뭡니까?"

단도직입적인 용찬의 태도에 전 지사의 얼굴이 경직됐다. 그런 표정을 숨기기라도 하듯 그는 탁자에 가져다 놓은 커피 잔을 들었다.

"커피 들게."

용찬은 커피 잔을 들며 슬며시 전 지사의 얼굴을 살폈다. 전 지사는 한 모금 마시고 잔을 내려놓더니 일어섰다. 그리고는 책상 위에서 서류를 집어 들고 와서 탁자 위에 놓았다. 신문에 나지 않은 용찬이 쓴 기사 사본이었다. 전 지사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으나 용찬은 자신의 쓴 기사가 전 지사에게 흘러 든 것에 분노가 치밀었다.

"자네가 쓴 기사 봤네. 어떻게 해서 이런 정보를 입수했는지 파악 중이지만 이건 불법 아닌가? 도대체 이런 엉터리 정보를 준 사람이 누구야?"

"그게 왜 엉터리입니까? 신문에 실리지도 않은 내 원고가 왜 여기 있습니까? 이걸 가로채 전해준 사람이 누군지 부터 밝히십시오."

용찬은 초장에 기를 잡히면 안 된다는 생각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전형진은 노회한 정치인답게 차분한 어조로 대꾸했다.

"자네 의도가 뭔가? 아직 공식적으로 제안된 것도 아닌데 하나도 프로젝트를 사전에 발설해서 얻으려는 게 뭐야?"

"기사는 공익을 우선으로 합니다. 하나도 프로젝트가 진정으로 제주도에 이득이 된다고 보십니까?"

"암. 큰 이득이지. 앞으로 제주도를 먹여 살릴 귀중한 블루오션 프로젝트야. 하나도 개발로 건설경기가 살아날 거고, 젊은이들 일자리가 생겨나고 관광객이 몰려들면 제주도 경제가 활성화 되지. 거기다 연간 지방세로 벌어들이는 수입이 얼마나 되는지 생각해 봤어?"

"하지만 그 전에 그 땅에서 조상대대로 살아온 지역주민들의 생활 터전이 무너지고 가족이 해체되는 건 생각해 보셨나요?"

"개발이냐 보존이냐의 논리는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야. 자원이나 자본이 취약한 이 땅에서 관광산업을 마냥 경관에 의존하던 시대는 지났어. 지금은 글로벌 세상이고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제주가 살 수 있어."

"도대체 얼마나 끌어 모아야 제주민이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까? 지금 몰려드는 관광객만으로도 제주는 포화지경입니다. 좁은 도로에 차는 막히고 오수와 쓰레기는 넘치는데, 더 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면 청량과 쾌적함을 사랑하는 제주민들은 어디 가서 숨을 쉬란 말입니까?"

용찬의 말에 전형진은 미간을 찡그렸다.

"기자들은 원래 다 그렇게 삐딱한가? 자네가 쓴 기사를 다 찾아 읽었어. 그런데 하나같이 부정적인 것들뿐이야. 중국 자본을 유치해서 제주경제가 얼마나 성장했는지 아나? 지난달 말 기준으로 한 해 중국에서 제주도로 유입된 돈이 6천억이야. 헌데 전국적으로 유입된 중국 자본 18조 원에 비하면 5%로 안 되는 규모야. 그런데도 마치 제주도를 중국에 팔아먹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디고. 중국인이 매입한 5억 원 콘도 1채당 취득세, 재산세로 연간 2400만 원이 걷혀. 그로 인해 지방세수가 엄청나게 불어나고 관광진흥기금도 큰 폭으로 증가하고 있어. 그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반대만 하고 있으니, 나 원 참."

개발론자의 입장에서 보면 용찬의 태도가 답답한 것은 당연했다.

"그것이 제주민의 삶의 질을 담보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 아닙니까? 이 좁은 땅덩어리에 연간 4천만 명이 들어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름다움으로 각광 받던 세계 유명 관광지가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인해 교통과 소음과 쓰레기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다는 건 아시죠? 우리도 10여 년 안에 곧 그렇게 된다는 논문도 나왔습니다."

"그건 대책을 세워야겠지. 헌데 두목회는 뭐야? 우리 경제문화연구소 회원의 정기적인 친목 모임을 마치 조폭 집단처럼 매도해서야 되겠어? 자네 앞으로 조심하게. 우리 모임이 그렇게 만만한 조직이 아니야. 나름대로 다 한 가닥 하는 사람들이고 중앙 주요기관과도 맥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명심해."

주요기관이라는 정체가 각종 수사기관을 말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은근한 협박이었으나, 기자로서의 용찬의 소신과 의지는 더 강했다.

"그럼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랴오닝 그룹과는 어떤 관계입니까?"

그 순간 정면으로 응시하던 전형진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곧 태연을 가장하며 어색한 미소까지 보였다.

"랴오닝? 중국 신흥재벌 말이지? 유치하려는 중국 자본 중 하나지. 오라 그러고 보니 우리 하나도에서 얼굴 봤지? 왕금산이 친구라고 하더군. 중국에서 투자를 하겠다기에 예의상 따라가서 하나도의 부가 가치를 설명해 줬지. 왜 그게 잘못됐나?"

"하나도가 어떤 곳인지 압니까? 중국인들이 하나도를 그들의 섬으로 만들려는 이유를 아냐구요? 하나도 서쪽은 북한과 중국으로 드나드는 배의 해상통로입니다. 그리고 강정해군기지를 견제할 수 있는 곳이죠. 그들이 하나도 어딘가에 레이다를 설치해 놓고 감시할 수는 해상 요지란 말입니다."

"그걸 우리 정보 당국에서 가만 두고 볼 거라 생각하나? 그건 지나친 억측이야."

"어디 두고 보면 알겠죠. 저는 하나도 주민, 아니 당신들이 사랑하는 제주도민의 입장에서 취재하고 기사를 쓸 겁니다."

"그럴 각오면 신문사 사표 내는 게 나을 걸. 어디 마음대로 해봐. 하나도에 관해서 기사 한 줄 실리나. 스스로 무덤 파고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군. 허허허."

전형진은 자신 있다는 듯이 조롱하는 웃음을 날렸다.



입안이 텁텁했다. 돌아오면서 아무리 생각해 봐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삭일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선 술과 담배가 묘약이다. 용찬은 기어코 담배 가게의 문을 열었다.

감당하기 힘든 상황의 무게에 용찬의 의지가 무너졌다. 해연 때문에 끊었던 담배였는데 한 모금 빨아들이니 예전의 감미롭던 맛이 되살아났다.

단골 식당에 들러 시켜놓은 밥엔 숟갈도 대지 않고 담배 안주에 연거푸 소주만 마셨다.

그러는 중에 식탁 위에서 휴대 전화가 울렸다. 왕금산이었다. 용찬이 응대를 하기 전에 금산의 다급한 목소리가 먼저 튀어 나왔다.

"너 어디야? 당장 좀 만나. 베이징으로 와."

대답도 하기 전에 전화는 끊겼다. 전형진에게서 소식을 전해 듣고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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