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바다와 문학] (27) 허영선 시집 '해녀들'

[제주바다와 문학] (27) 허영선 시집 '해녀들'
  • 입력 : 2019. 11.01(금)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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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향하는 제주 해녀들. 허영선 시인은 '해녀전'을 통해 우리 앞에 거대한 위로를 건네준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준다.

"어쩌면 우린 모두 해녀의 생 아니겠나"
시인이 호명한 20여명 해녀
이 땅 아픈 역사 살아낸 여인
말없는 물노동으로 삶 증거


예전엔 미처 못느꼈지만, 다시 펴든 형광 주황색 시집 표지에서 테왁이 떠올랐다. 평생 목숨줄 같은 테왁을 부여잡았던 여인들이 그 안에 있었다. 제주 허영선 시인의 시집 '해녀들'(2017)이다.

시인은 해녀들 한 명 한 명을 불러내 시로 자서전을 썼다. 그들은 일제강점기 스물 즈음에 지독한 고문을 겪으며 격류의 세월을 헤쳐왔다. 세찬 칼바람과 눈보라치는 해협을 건너 원산, 청진, 일본, 중국,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물질을 나섰다. 뿐인가. 4·3이라는 동굴 속에서 남편 잃고 살아남아 모든 걸 감당하며 혈육의 입을 위해 차거운 물에 몸을 담가야 했다.

'전복 해초 바다 물건 제값 달란 죄/ 악덕 상인 파면하란 죄/ 바다는 우리 밭, 호미 들고 빗창 든 죄// 돌담 위로 난바다 식민의 바람 편향적으로 불 때/ 죄 없이 죄인 된 스물둘 소녀회 회장/ 꽁꽁 팔 묶여/ 꿈마저 호송당했습니다'('해녀 김옥련 1' 중에서)

해녀 김옥련, 고차동, 정병춘, 덕화, 권연, 양금녀, 양의헌, 홍석낭, 문경수, 강안자…. 시집엔 '해녀전-울 틈 물 틈 없어야 한다'란 묶음 아래 시인이 만났던 21명의 제주 해녀 생애가 펼쳐진다. 이 땅의 아픈 역사를 살아낸 그들은 맺힌 가슴을 물질로 풀어내고 있었다. '뼈와 뼈끼리 악을 쓴다 해도 늙은 무르팍에 일본제 파스 한 장 붙이고' 견뎌냈던 이가 '해녀 홍석낭' 만이겠는가. 해녀들은 '물속 흐린 날만큼이야 하겠나'며 짓물러진 상처를 안은 채 다시 바다로 향했다.

시집 말미에 시작(詩作)에 얽힌 배경을 담은 산문 '그들은 물에서 시를 쓴다'를 덧붙여놓았다. 이 역시 한편의 시처럼 읽힌다. "바다의 그들은 단호하다. 비울 것 비워야 한다. 껴안을 건 껴안아야 한다. 대해에서 그들은 그들끼리 서로의 이름을 불러준다. 그들은 극지의 물 속에서 극한의 노래를 부를 줄 안다."

그들이 두려움 없이 '왁왁한' 물밑까지 잠수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시인은 사랑에서 그 답을 찾는다. "사랑을 품지 않고 어찌 물에 가겠는가. 어떤 절박함 없이 어찌 극한을 견디겠는가." 그들은 물에서 온 몸으로 사랑을 밀어넣으며 먼 바다까지 나가 삶을 건져올렸다. 유년에서 청년기를 지나 어느덧 아흔에 이른 그들이다. 범벅된 땀과 눈물은 바다에 녹아들었고 그들의 나날은 그대로 시가 되었다.

"그러니까, 당신들은 삶이란 무엇인가를 말없는 물노동으로 보여주었다. 우리 앞에 거대한 위로를 건네주었다. 어쩌면 우리는 큰 빚을 지고 말았다." 그들이 물에서 쓴 시를 '해녀들'을 통해 받아적었다는 시인은 우리 앞에 이런 시를 띄운다. '어쩌면 우린 모두/ 해녀의 생 아니겠는가/ 먼바다 사투에서 살아남아 돌아오던/ 해녀의 생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해녀는 묵은 것들의 힘을 믿는다'의 한 구절이다.

진선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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