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바다와 문학] (23)강통원 시 '무적'

[제주바다와 문학] (23)강통원 시 '무적'
"안개 낀 제주 바다에 흐느끼는 소리"
  • 입력 : 2019. 10.04(금)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제주 바다를 배경으로 제주시내가 자욱한 안개에 휩싸여 있다. 시 '무적'은 안개 낀 바다에 울리는 신호음에 빗대 '갇힌 섬' 제주를 묘사했다. /사진=한라일보DB

1978년 발간 첫 시집 표제작
"제주島 표류하는 한 척의 배"
유배의 섬에 갇힌 운명 노래

변방, 유배지, 닫힌 섬. 그의 시에 흐르는 제주섬 이미지는 '수탈의 역사'와 닿아있다. 1977년 등단 추천작을 표제로 달고 이듬해 '무적(霧笛)'이란 이름의 첫 시집을 내놓은 강통원 시인(1935~2016). 서귀포 중문 태생으로 줄곧 제주에서 살다간 그의 초기작을 따라가본다.

'언제부터인가./ 닻줄이 끊기어 표류하는/ 제주도(濟州島)는 마치 한 척의 배다.// 어데를 둘러보아도/ 가없는 하늘과 수평선이다.// 하지만 하늘과 수평선은/ 하나의 약속./ 어딘가에 기항지가 있다는/ 약속인데// 누구의 입김인가./ 때때로/ 짙은 안개가 밀려와서/ 하늘과 수평선을 지워버린다.// 무적이 흐느낀다.'('무적' 중에서)

제주는 한때 원악도(遠惡島)로 불렸다. 서울과 멀리 떨어져있고 살기가 어려운 섬이라는 뜻이다. 처음 시집을 펴낼 당시 40대 초반이던 시인은 물 안에 갇힌 '유배지의 후예'가 되어 '무적'을 써나갔다.

안개로 한 치 앞을 보기 어려운 현실에서 하늘과 바다의 길을 구분해주는 건 빛이 아니라 소리(무적)였다. 시인은 '빛이 없는/ 캄캄한 항로에/ 제주도는 좌초하였다."는 비극적 인식을 드러낸다. 급기야 '신이여/ 한 줄기 미풍을 보내어/ 저주스런 이 숨결을 거두어 가라.'고 기도한다.

제주도에 좌절하는 동시에 제주도에 대한 신앙고백(박철희)이 이어지는 '무적'을 읊은 시적 화자가 있는 곳은 배 안이다. 그 화자는 시인의 분신이거나 그림자(김영화)로 해석된다. 그가 배에서 바라본 제주는 눈물과 한숨으로 파도치고 바람부는 곳('섬')이다.

'울고 와서/ 울고 간다// 저기 탐라가 앉아 있다./ 탐라의 한숨이 들린다.// 산넘어 가라/ 물 넘어 가라//저기 제주가 서 있다./ 제주의 숨소리가 들린다.'('수평선' 전문)

훗날 기행시집 '시의 여로'(1995)를 묶어 내며 낯선 이국의 산하와 도시들을 방문해 미지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게 '다행'이라고 했던 시인은 섬에서 사는 일을 숙명처럼 여겼던 듯 하다. 4·3사건으로 풍비박산난 고향 마을을 떠나 제주시에 정 붙여 살던 시인이 50대 후반에 자신의 인생사를 풀어내듯 써나간 '제주시 산조'의 한 구절로 그걸 짐작하게 만든다.

'나'의 뜨거운 눈물 떨어지지 않은 구석 없고, 애환의 발자국 찍히지 않은 곳 없는 제주시(제주). '제주시 산조'에 등장하는 제주는 '무슨 벗어날 길 없는 운명처럼 유착되어 버린' 곳이다. '나'는 토주에 취해 어두운 밤길을 비틀거리면서도 '그래도 인정에 감사하고/ 하늘의 섭리에 감사하며 살아간다.'는 노래를 부른다.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3411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