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한라에서 백두까지] (2)다시 백두에 서다

[2019 한라에서 백두까지] (2)다시 백두에 서다
고봉으로 둘러싸인 하늘의 호수… 분단·역사의 아픔 교차
  • 입력 : 2019. 09.12(목)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이름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백두산 천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해발 2500m 이상 봉우리만 해도 27개나 되는 고봉들로 둘러싸인 천지는 말 그대로 하늘의 호수다.

백두산 최고봉인 장군봉(해발 2750m)을 비롯 정상부에 펼쳐진 봉우리들은 긴 세월 동안 눈, 바람, 비에 깎이면서 다양하면서 독특한 화산경관을 형성했다. 칼날 같은 날카로운 능선 아래 펼쳐진 호수면은 신비로웠다. 경사면에서는 빙하성 침식이, 화구호 내부에서는 화산분출 흔적 등을 볼 수 있다. 천지는 볼 때마다 경이로움을 느낀다. 취재팀은 지난 달 10일 서파 코스로 등정에 나서 천지를 볼 수 있었다.

백두산 천지. 강희만기자

'한라에서 백두까지'는 백록담과 천지를 빼고 생각할 수 없다. 국토의 양극단에 위치한데다, 닮은꼴 산정호수는 물리적 거리를 뛰어넘어 한민족으로서의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요소다.

천지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화산 호수이자, 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세계에서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 칼데라호('백두산 화산'/2011년/김한산)로 알려지고 있다. 천지 수면의 해발 고도는 2194m로 연중 일정한 수면을 유지한다. 이는 천지 물의 원천이 주로 화구 밑바닥에서 솟아나는 지하수(61%)에 의존하고, 자연 강수가 약 30%를 차지하는데서 기인한다. 나머지 9% 정도가 천지 주변에서 흘러드는 물이다. 강수에만 의존하는 한라산 백록담과는 대조적이다.

백두산 천지의 가장 깊은 곳은 384m로 천지 남쪽이 좀 얕고 북쪽이 깊다. 평균 깊이는 214m, 천지 수면의 해발 고도는 2194m이다. 둘레는 14.4㎞에 이른다. 백록담은 화구호 둘레 1720m, 깊이는 108m, 넓이는 208,264㎥ 규모다. 백록담은 만수 시에는 깊이가 4m 정도 되지만 건기에는 바닥을 드러내는 등 마르는 날이 종종 있다. 때문에 백록담 물이 빠지는 원인 규명과 이를 유지하는 방안이 과제가 되고 있다.

백두 등정에 나서고 천지를 보는 내내 분단의 아픔은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의 역사도 오버랩된다. 일제는 1909년 청나라와 이른바 간도협약(도문강중한계무조약)을 맺고 만주침탈을 위해 백두산과 천지를 청에 할양했다.

자연사 박물관에 있는 백두산 모형.

천지는 오늘날 남북을 아우르는 한반도와 중국이 서로 교차하는 곳이다. 서파 산문에서 50분 정도를 버스를 타고 이동 셔틀버스 주차장에서 내린 뒤 1442계단을 오르면 천지 바로 앞에 37호 경계비가 세워져 있다.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북한과 중국의 국경임을 각인시켜주는 것이다. 천지는 전체 면적(9.18㎢)의 54.5%를 북한이, 나머지 45.5%를 중국이 점유한다. 이는 1962년 북-중 국경조약과 1964년 북-중 국경에 관한 의정서 체결에 따른 것이다.

한국 관광객이 백두산 등정은 중국 정부가 지정한 장백산(창바이산) 자연보호구에 위치한 서파, 북파, 남파로만 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남북관계가 주춤거리는 마당에 북한쪽으로의 접근은 언제 가능할지 가늠하기 어렵다. 한라산-백두산 학술교류 협력이 당장 성과로 이어지기엔 어려움이 따른다. 제주도로서는 실천가능한 방안을 모색하면서 한라-백두의 교류를 대비해 나갈 필요가 있다. 이윤형기자



[전문가 리포트] 홍기표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위원

백두-한라, 동아시아 대륙과 해양을 대표


홍기표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위원.

백두산은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2750m)으로 산세가 장엄하여 일찍이 우리 민족의 발상지로, 또 개국의 터전으로 숭배되어 왔던 민족의 성산(聖山)이다.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에 의하면 백두산은 불함산(不咸山), 개마산(蓋馬山), 태백산(太白山), 도태산(徒太山), 백산(白山), 장백산(長白山), 가이민상견아린(歌爾民商堅阿隣) 등으로도 불린다고 되어 있다. 이중 문헌에 나타난 최초의 이름은 불함산이다. 개마(대)산 및 도태산은 중국 측 기록인 '삼국지'와 '위서'에, 장백산은 '요사'에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중국에서는 백두산을 장백산으로 부른다.

백두산이 우리나라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유사'에서이다. 우리나라 건국신화가 수록된 내용 중 "…환웅이 무리 3000명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신단수 아래 내려오니 이를 신시(神市)라 이르렀다."에서 태백산을 곧 백두산으로 보고 있다. 백두산이라는 명칭이 문헌에 처음 소개된 사례는 '고려사'이다. 백두산의 명칭은 최소한 고려시대부터는 우리 역사에서 널리 불려지고 있었다.

백두산의 백두(白頭)는 '흰 머리'라는 뜻이다. 이는 백두산 정상부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말이다. 즉 흰 눈이 녹지 않고 오래도록 남아 있거나, 화산활동에 의한 백색의 부석(浮石) 때문에 백두산 정상은 멀리서 볼 때 사철 흰색이다. 이 때문에 '머리(정상)가 하얀 산'이라는 뜻의 백두산 이름이 붙여졌다. 이익(李瀷)의 '성호사설'에 의하면 "옛적에 불함산을 백두산, 장백산 또는 백산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사계절 오래도록 춥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라고 했다. 또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에 의하면 "백두산의 옛 이름은 불함산이고, 중국은 장백이라 부르고, 우리는 백두라 부르는데, 산이 매우 높아 사계절 내내 얼음과 눈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라고 되어 있다. 한편 한라산의 한라(漢拏)는 '은하수를 잡아당긴다.'는 뜻이다. 하늘과 맞닿아 은하수로 이어지는 높이 솟은 산이라는 표현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한라라고 말하는 것은 운한(雲漢, 은하수)을 나인(拏引, 잡아당김)할 만하기 때문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번 탐사는 민족의 영산(靈山)인 한라산을 출발하여 민족의 성산(聖山)인 백두산을 다녀온 여정이었다. 2019년 8월 탐사단을 매개로 성산과 영산이 만난 것이다. 근래 우리는 산천과 민족을 하나로 묶는 '한라에서 백두까지'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해방 이래 70여 년 분단 상황이 지속되는 마당에 하루속히 통일을 이루기 위한 염원을 담은 말이다. 백두산은 백두대간으로 불리듯이 한반도 산맥의 시원이다. 한라산은 예로부터 신선이 사는 선산(仙山) 또는 신산(神山)으로 불렸다. 동아시아의 대륙과 해양을 대표하는 두 산이다. 두 산의 만남을 통해 남북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더 나아가 '동아시아 대륙과 해양을 이어주는 제주'의 위상이 제고될 날이 곧 오리라 꿈꾸어본다.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7446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